사춘기




박상욱이 가출했다.

착해빠진 이선규는 꼭 이럴 때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인종을 눌러 봐도 김용철은 집을 비웠는지 대꾸가 없었고, 윤용만 그 자식도 꼭 짠 것처럼 안 보였다. 다이얼을 돌리려던 김경찬의 번호는 몇 번 눌렀다가 도로 지워 버렸다. 쌀쌀한 봄밤에 겉옷 하나 걸치고 지갑과 핸드폰만 쑤셔넣은 것치곤 갈 곳이 없었다.

날은 맑고 텅 빈 학교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허술하게 걸어둔 문을 밀고 상욱은 모래 위로 발을 가볍게 끌었다. 먼지가 부스스 일어났다.그림자 위에 한 겹 그림자를 겹친 후관 건물을 돌아 그는 계단 비상구까지 걸어갔다. 차라리 잠겨 있거든 돌아가려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려 봤다. 철컥 하고 무게감 실린 문이 앞으로 밀려나왔다. 상욱은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애꿎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옥상에 다다를 때까지 제 발소리만이 뒤를 쫓았다. 조금 걸었다고 아린 발목을 기대 놓고 그는 철문을 밀어 열었다. 무심코 버릇처럼 전깃줄을 찾아 벽을 더듬는데, 문가에 달린 백열 전구에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다. 곧 끊어질 것처럼 얕은 불빛이 점멸할 것처럼 반짝거렸다. 고개를 돌렸다가 상욱은 옥상 난간에 바짝 몸을 기대 선 전학생을 봤다. 팔꿈치로 난간을 짚고 입가에서 버끔버끔 멋없이 담배연기를 흘리면서, 흘끗 보는 시선은 제 영역에 발 들인 그를 탓하는 것마냥 영 탐탁치 못했다.

"너 왜 여깄냐."

그 질문은 영민의 입에서 먼저 나온 탓에, 상욱은 제 차례를 빼앗긴 것처럼 괜히 기분이 나빴다.

"…학생이 학교에 있지 그럼 어딨냐."

무심코 겉옷에 손을 넣어봤지만 담뱃갑이 잡힐 리가 없었다. 영민의 손끝에서 탁탁 튀는 주황색 불똥을 쳐다보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난간에 다가가 자리를 잡듯 똑같이 기대어 서서는 상욱이 되물었다.

"그럼 넌 이 시간에 뭐 하는데."
"집에서 피면 냄새 배잖아."

대꾸하면서 영민이 픽 웃었다. 한 개피 권할 맘은 죽어도 없는지 도로 담뱃대를 입에 물고, 그는 난간 위에 걸친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잠깐 원래 있던 침묵이 내려앉으면서, 철문 곁에 달린 전구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튀는 소릴 내는 것만 간간이 들렸다. 깜박, 깜박 다해 가는 전등을 쳐다보다 상욱이 말했다.

"불 켜두면 순찰 돌 때 들킬걸."
"그 전에 나가지 뭐."
"…어디로."

상욱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젯밤 내린 빗물이 고인 난간 위에 치익 꽁초를 꺾어 비비고 영민이 남은 재를 툭툭 털었다. 고급스럽지 못한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혼자 묻고 외면하기는 지나치게 조용한 탓이었다. 방백을 이해할 생각 없던 영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병신같이 가출했냐."

치직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불이 나갔다. 순식간에 사라진 불빛 탓에 시야가 깜깜했다. 그럴 일도 없었겠지만 고개를 끄덕여도 아마 보이지 않았을 거였다. 문득 흐릿하게 보이는 그림자가 휙 뭔가를 던지더니 성큼성큼 문 쪽으로 향했다. 상욱은 투구루루 가벼운 소리를 내며 제 발치까지 굴러온 빈 라이터 통으로 시선을 내렸다. 겉면에 유흥업소 전화번호가 인쇄된 싸구려 라이터를 쳐다보다 문득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자."

철문이 끽 하고 울었다. 영민이 선심 쓰듯 한 마딜 덧붙였다.

"갈 데 없다며."




…참 열심이라 보기 좋다, 우리 아들. 가족여행에도 남아서 공부하고. 집에 들어갈 때 간식 사 가마. 내일 보자.

받지 않은 음성사서함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독백을 했다. 영민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병을 꺼냈다. 컵 두 개를 꺼내놓긴 했는데 제 쪽에만 물을 따르고 도로 내려놨다. 상욱은 빈 컵을 들여다보다 말고 먼저 방으로 휘적휘적 사라져 버리는 영민의 등을 가만히 노려봤다. 마저 물을 채울 즈음 부엌 센서등이 꺼졌다.

노트북을 끌어다가 침대 헤드에 기대 앉은 영민을 흘긋 보면서 상욱은 방문을 닫았다. 책상에 물컵을 내려놓고 무심코 쳐다봤더니, 대충 낙서한 종이며 책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자리를 권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멋대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려는데, 맨 위에 쌓인 책등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반듯하게 쓴 큰 글씨로 짤막한 쪽지가 적혀 있었다.

- 알려준 대로 했더니 풀렸어!! 고마워 영민아 ^_^!!!

꾹꾹 눌러쓴 느낌표가 꼭 그 말투까지 생생하게 들릴 듯싶었다. 상욱은 문득 손을 뻗어서 그걸 떼어봤다.

"이 새끼 나한텐 질문 한 번 안 하더니."
"하도 귀찮게 해서 대꾸해 준 거야."

고개만 기울여 쳐다봤다가 영민이 대꾸했다. 무릎에 올려둔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타닥타닥 시끄러웠다.

"넌 서울대 가겠다."
"글쎄."
"다음 시험도 만점 받게?"
"뭐 어쩌면."

짤막하게 건성으로 대꾸하는 영민의 목소리는 위잉 돌아가는 기계음에 반쯤 먹혔다. 침대 위에서 부스럭부스럭 자세를 고쳐 앉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상욱이 의자를 빙그르 돌려 포스트잇을 도로 제자리에 붙였다.

"하긴 니가 알겠냐. 살다 보면 그런 게 중요한 사람도 있거든."

쌓아둔 책등을 손가락 끝으로 도르륵 긁어내리다 그가 덧붙였다. 그 탓에 비뚜름하게 붙은 포스트잇을 다시 꼭 눌러 고정시켰다.

"니 얘기야?"
"…아니."

타닥타닥, 자판 치는 소리. 그렇게 대꾸하면서 상욱은 의자에 걸쳐둔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나오고부터 줄곧 꺼 뒀더니 냉기를 품어 차가웠다. 켤까 말까 주저하는가 싶었던 전원을 꾹 누르고, 그는 핸드폰을 책상 한켠에 뒤집어 놓았다.

"선규가 가끔 너 얘길 하더라."

몸을 뒤로 기댔더니 등받이가 기울어지면서 얼굴이 가려 보이질 않았다. 상욱은 불규칙하게 두드리던 소리가 천천히 느려지다 이내 멎는 것을 들었다. 잠깐 고민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던 손가락은 곧 썼던 걸 전부 지우려는지 백스페이스를 한참 눌렀다.

"뭐라고?"
"너랑 떡볶이 먹으러 가고 싶다던데."

안 어울리게 튀어나온 소리에 상욱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면서 웃었다. 영민이 자리에 없는 누굴 타박하듯 대꾸했다.

"걘 그런 얘길 왜 너한테 하냐."

탁 하고 노트북 덮는 소리가 났다. 영민이가 화학 숙제 도와줬다, 어제 걔네 집 갔었거든. 이것 봐라, 비타오백 영민이가 사줬어! 니가 아침부터 코피 났다고 동네방네 소문내서 그렇잖아. 아니거든, 힘내서 공부하라고 사준 거거든. 밤새 야동 보다 코피쏟은 주제에. 아, 아냐! 여튼 받은 게 중요하지. 김용철이 뭐라고 하든 꿋꿋하게 시시콜콜한 것들을 자랑하는 버릇은 이제 거의 익숙했다. 그런대도 굳이 말해 줄 맘은 못 먹고 상욱은 입을 다물었다.

"담배 한 대만 빌리자."

손짓하는 그를 쳐다보다 영민은 순순히 책상 서랍을 턱짓해 가리켰다. 보이는 대로 더듬다 둘째 칸에서 뜯어둔 담뱃갑을 찾아냈다.

"현관 나가서 피워."

대답을 들은 상욱이 방을 나가자, 영민은 노트북을 들고 일어났다. 책상에 내려놓고 충전기 선을 끌어다 꽂으려는데 아까 그 포스트잇이 눈에 들었다. 연필로 눌러 썼을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이선규는 졸음이 쏟아지면 연필 꼭지를 입에 물고 자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언제 선규가 학교에서 지우개 달린 연필을 쓰고 있길래 뭐냐고 딱 한 마디 했더니, 제가 준 건 시험 볼 때만 쓰려고 아직 아껴뒀다고 제풀에 대답했었다. 생각하다 말고 영민은 메모가 붙은 책을 안으로 밀어뒀다. 아까까지 상욱이 앉았던 의자에 털썩 자리잡는데,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제 것은 아니고 방금 켜둔 상욱의 폰이었다. 형이 찾는 전화였다. 진동은 한참 만에 그치고, 부재중 전화 갯수에 하나가 더해져 화면에 떴다. 별 생각 없이 시선을 떼려는데, 곧바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지잉, 지잉, 하는 이름이 김경찬이다.

'여보세요, 상욱아. 상욱아? 계속 안 받아서 걱정했어. 핸드폰은 왜 꺼둔 거야, 지금 어딘데?'
"……."
'…상욱아?'
"잠깐 나갔어."

무슨 생각으로 남의 전화를 받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맥락을 끊는 대꾸에 잠깐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둘 걸 그랬나, 생각하는데 경찬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혹시 최영민?'
"……어."
'상욱이랑 같이 있었어?'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재차 물었다. 제 대답 하나 들었다고 참 솔직하게도 안심하고 마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짝 귀에서 뗀 수화기를 흘끗 쳐다보고 그냥 끊어버릴까 고민하는데, 짤막하게 덧붙인 대답 끝에 망설이던 물음이 딸려 나왔다.

"어."
'…상욱이, 오늘 집엔 안 들어간대?'

닫힌 방문을 한 번 돌아봤다가 영민은 툭 대꾸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 그렇지. 미안.'

경찬이 조분조분히 대답했다. 미안하단 소릴 듣고 나니 괜히 기분이 나빠, 영민은 걸터앉았던 의자를 빙글 반 바퀴 돌렸다.

"걱정되냐?"
'응? 아, 선규가 전화를 못 받았는데 다시 걸었더니 꺼져 있다고 해서….'

얼버무리듯 경찬은 말끝을 흐렸다. 영민은 대충 손에 잡힌 연필을 손등 위로 휘이 휘 돌리면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깐 밧데리 나갔나보지. 끊는다."
'…잠깐만.'

툭, 하고 손 안에서 튕겨나간 연필이 투구루루 바닥을 굴러 의자 밑으로 사라졌다. 에이 씹, 속으로 욕을 삼키면서 그는 허리를 숙여 의자 아래를 더듬었다.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붙인 핸드폰에서는 횡설수설 조금 분주하게 말을 이어붙이는 경찬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한 마디만 전해 줄래? 다음엔 그냥 나한테 먼저 전화해도 된다고, 아니. 담에 또 집 나오라는 건 아니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 그냥….'
"니가 직접 말해."

가까스로 손끝에 닿은 연필을 끌어다 손아귀에 쥐고 영민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어, 뭐?'
"와서, 말하라고. 어디 안 가니까."

덜컥 문이 열리고 들어서려던 상욱이, 뜻밖에 책상 앞에 앉은 그를 발견하고 표정을 구겼다. 그 손에 들린 제 핸드폰을 보고서야 다가와 손을 내미려는데, 영민이 귀에서 뗀 수화기에서 제법 밝아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구 전화야?"
'…응, 지금 갈게! 선규도 갈 거야, 얼른 전화해서 나오라고…. 좀만 이따 봐!'

꼴에 당당하게 내민 핸드폰을 돌려받자 이미 제 할 말을 다 하고 끊긴 화면에 김경찬 이름 석 자가 떠 있었다. 상욱은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한참 눈을 껌벅였다.

"다들 집 나온다는데, 반장 주제에 참 좋은 거 가르친다."

다행히 심이 곯지 않은 연필 끝을 후 불어 툭툭 털고 영민은 그걸 책상 한켠에 얌전히 내려놨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가, 또 애매한 표정의 상욱과 눈을 마주쳤다.

"아, 씨발. 담배 냄새."

코끝을 찌푸리곤 도로 앉아 있던 의자를 빙글 돌려 버리는 영민을 쳐다보다, 상욱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사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셉션AU  (0) 2016.04.10
질식의 봄  (0) 2015.08.09
나와 너의 파편  (0) 2015.05.24
가라앉는 날 붙잡아줘  (0) 2015.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