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사춘기

상욱경찬





봄은 꽃이 내렸다. 등을 떠미는 바람이 얄궂어 벚나무는 채 다 피기도 전에 잎을 떨궜다. 일학년 여자애들이 조잘거리며 바람 부는 방향으로 뛰어가다 비끗 어깨를 부딪혔다. 그 애들이 고개를 돌리고 어색하게 웃더니 사과한 뒤 이내 저들끼리 또 타닥닥 뛰어가 버린다. 벚꽃잎이 날렸다. 어깨 아래로 미끄러진 책가방을 끌어올리며 경찬은 조금 늦게 배시시 웃었다.

"야."

턱 하고 어깨에 걸쳐 오는 무게감에 눈을 들었더니, 막 골목에서 뛰어든 상욱이 저에게 맞춰 천천히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경찬은 번졌던 미소를 천천히 거뒀다. 네가 올 줄 알아서 웃음이 났구나.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냐."

"그런 거 아니야."

여자애들이 사라진 쪽에 목을 빼고 기웃대며 상욱이 묻자, 경찬이 고개를 저었다. 우우웅 진동이 울려 상욱은 팔을 거두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에이, 또 스팸전화. 투덜거리면서 도로 그걸 교복 안주머니에 밀어넣는 손을 눈으로 쫓다가 경찬은 시선을 돌렸다. 봄 냄새가 난다. 간밤에 내린 비에 풀 젖은 냄새, 빳빳하게 다린 와이셔츠에 묻은 풀 냄새가 났다. 바람에 훌훌 날리던 벚꽃잎이 시야를 흐트러뜨렸다. 앞이 살짝 가려 덜 깬 새벽 잠처럼 어지러운데, 문득 왼편에서 걷던 손이 불쑥 뻗어나왔다. 경찬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털어내고 상욱이 핀잔을 줬다.

"이런 거나 붙이고 다니고."

눈을 들어 쳐다보는 사이 손이 거둬졌다. 경찬은 제 손등으로 부스스해진 앞머리를 대충 비볐다. 늦었다, 말하면서 앞으로 몇 발짝 뛰어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 그는 한 박자 느리게 웃었다.



창가로 볕이 쏟아졌다. 금을 긋듯 책상 안으로 반 이상 넘어온 햇빛에 눈이 부셔 코끝을 찌푸렸다. 일찍 끝난 수업에 춘곤증을 못 이기고 누운 반 아이들, 종이 치도록 오 분을 채 남기지 않은 시곗바늘이 톡톡거리는 소리. 닫히다 만 것처럼 비끔 열린 창문틈으로 무심코 벚꽃 가지에 손이 가 닿았다. 경찬은 한번 교실 안을 둘러봤다. 누구의 시선도 여길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두 손을 뻗어 가지끝을 툭 끊었다. 바람에 반쯤 내린 블라인드가 펄럭이다, 책상에 흩뿌린 햇볕의 절반을 거둬 갔다. 그늘이 진 곳으로 꽃봉오리를 가져다 살짝 뒤집어 보았다. 떨어질 순간이 오기도 전에 꺾인 꽃잎이 얕은 홍조를 띄었다.

괜히 한번 더 살짝 뒤를 돌아보고 경찬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대 봤던 꽃잎을 잡아서 한 장 톡 뜯었다. 겉으로 봐선 알 수 없게 입술을 축이는 척 조용히 하나를 세고, 다시 빙글 돌려 한 장을 더 뜯어냈다. 조심스런 의식 같은 순서가 지날수록 차례차례 떨어져 꽃잎무덤이 쌓였다. 그렇게 눈에 보일 만큼 딱 몇 장이 남았을 때, 기척 없이 또 덥석 어깨에 올라오는 손길에 그는 흠칫 놀랐다.

“…상욱아."
"뭘 그렇게 놀라. 죄 졌어?"

앞의 빈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상욱이 물었다. 경찬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와서 또 툭 하고 속에서 뭔가 떨어져 내렸다. 이제야 왁자해진 교실 안 소음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는 아직 손에 들린 꽃가지를 부끄러워 내려놓았다.

"뭐 하고 있었냐?"
"그냥."

모아 둔 꽃잎을 양 손으로 소복이 끌어쥐면서 경찬이 대답했다.

"누나가 자주 했던 거. 한다, 안 한다, 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상욱이 되물었다.

"뭔데? 고민되는 게."
"해 뜨는 거. 서해 바다에서 볼까, 동해에서 볼까."

어색하게 웃으면서 경찬이 대답했다. 손아귀를 간지럽히는 꽃결이 부드러워서 그는 애써 모은 꽃모듬이 다 흐트러지도록 양손을 거뒀다.

"…내가 만약에 어디로 훌쩍 여행을 간다면 말야. 가끔 그런 생각 하잖아."
"그래서 몇 개 남았는데. 짝수야, 홀수야?"

슬쩍 제 품을 넘겨다보려는 상욱의 고갯짓에 경찬이 팔로 나뭇가지를 가리며 말했다.

"어디가 먼저인지도 모르면서."

동해인지 서해인지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는 눈에 띄지 않게 품은 가지가 까끌까끌하게 손목 안쪽을 찔러 오는 감촉을 생각했다. 굳이 빼앗을 맘은 없는지 상욱이 뒤로 나앉아 곰곰히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안 가는 선택지는 없는 거고?"

경찬은 눈을 깜박이다 웃었다.

"그냥 생각만."

바람이 훅 불어서 책상 위로 꽃잎들이 파드득 흩어지자, 눈을 동그랗게 뜬 경찬이 급히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드르륵, 하고 그것들을 한 손으로 주워 모아다 창문 밖으로 내버리더니 경찬은 몇 개 남은 낱이파리들을 쳐다봤다.

“바닥에 떨어지면 용만이가 화낼 텐데.”
“당번 내가 바꿔주지 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쳐다보면서 상욱이 대꾸했다.

“어차피 담임이 잠깐 남으래.”

볕이 들길래 경찬은 손을 뻗어 블라인드 줄을 당겼다.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시야가 어두워졌다. 핸드폰 화면에 한눈을 팔고 있는 상욱을 쳐다보다 경찬이 말을 이었다.

“혹시 만약 나중에 내가 보고 싶어지면, 상욱아.”

햇빛이 모두 가려져서 암순응이 덜 된 눈에 그 표정이 보일 턱이 없어서, 상욱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코끝을 찌푸렸다. 도르륵 창가에 부딪힌 블라인드가 안 닫은 창문 틈에 끼어 풀썩였다.

“딴데 가지 말고 바다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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