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영민선규
#연뮤전력60분
자장가에 잠들었다 깨어 보니 네가 없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열흘 남짓이 지났다. 날은 더워지는데 비가 올 기색은 들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어도 목줄기를 타고 땀이 흘렀다. 무더웠고, 선규는 짧은 며칠 새 용철과 용만을 몇 번이나 만났다. 게임을 하고 가끔 학원 근처에서 상욱을 만나 맥주캔을 땄다. 그럴 때면 간간이 비도 오지 않는 날 접이식 우산을 들고 나타나는 경찬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누군가 묻곤 했다. 야, 그나저나 그 만점 받은 새낀 뭐하고 있을까? 그날은 용만이었다. 대답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으레 지나가는 화젯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선규는 말끝을 흐리며 글쎄, 하고 웃었다. 비행기 타고 여행이나 갔겠지. 걔네 집 돈 졸라 많잖아. 용철이 말을 받았다. 막대 끝에서부터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둘은 한두 마디를 덧붙였다. 파리? 베니스? 하여튼 재수없는 자식. 한 갑에 몇 안 남은 담배를 나눠 피우는 것으로 그런 대화는 끝이 났다.
해가 질 무렵부터 하늘이 흐렸다. 일기예보에선 비가 올 확률이 삼십 퍼센트에 그친다고 했다. 삼십이면 여행길에 불곰을 만날 확률보다 크고 한 봉지에 사탕 두 개가 들어있을 확률보다 작다. 그럼 우산을 가지고 왔어야 했나. 비가 쏟아지기 전에 들어가려고 선규는 걸음을 바삐했다. 괜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기분에 머리 위를 가리고 하늘을 흘긋거리다, 아파트 정문 앞에 서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등이 후끈거리면서 눅눅한 공기가 코끝을 스몄다.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다이얼을 찾는데, 화단 옆에 기울어진 검은 우산이 눈에 띄었다. 안으로 오므라든 박쥐 우산은 혼자 쓰기에 넓었고, 둘을 가려 주기엔 비좁았다. 누군가 난간에 기대 놓은 것처럼 비스듬히 서 있던 우산이 살짝 움직였다. 비도 안 오는데 누가 그늘에서 우산을 쓴 걸까. 무심히 고개를 돌려 보니 좁은 어깨가 익숙했다.
"…영민아?"
확신을 담지 못하고 지나가듯 부른 말에 생각보다 빨리 그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냥 그대로 지나가버려야 맞을지도 모르는데, 멍청한 이선규.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그 기척을 살피다 삐리릭, 하고 제한시간이 지난 도어락이 자동으로 꺼졌다. 영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늘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제가 먼저 앞으로 가서 그 얼굴을 봐야 했다. 세 칸짜리 계단을 내려와 손을 흔들면서 다가갔다가, 앞으로 기울여 쓴 우산에 가린 표정을 보려고 선규는 고개를 살짝 숙여도 봤다.
"웬 우산? 오늘 비올 것 같아서? 애들이 너 많이 궁금해하는데, 잘 지냈어?"
한번에 대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질문을 하면서 선규는 순전하게 눈을 빛냈다. 속이 다 보이는 척 얕으면서 손 뻗으면 잡히지 않을 만큼 깊은 그 호의가 무서운 줄은 모른다. 우산이 그늘 위로 또 그림자를 만들어서 두텁게 두 겹으로 새겨진 밑에서 영민이 대꾸했다.
"…빌려준 노트 받으러 왔어."
"아, 그거? 아직 다 못 베꼈는데... 꼭 필요하면 지금 올라가서 가지고 올까? 난 상관없어."
선규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춤추는 듯 가벼운 동작으로 후닥닥 계단참에 발을 딛으려는 걸, 영민이 손을 뻗었다. 턱. 소맷자락이 열기를 그러쥔 따뜻한 손아귀에 잡히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고, 선규는 고갤 돌렸다. 우산을 쥔 손이 미끄러졌는지 뒤로 젖혀진 그늘 아래로 영민이 그를 쳐다봤다. 가지 말라고 잡은 걸까. 또 멍청하다고 핀잔 주려고 그러지? 그러나 선규는 그중 하나도 되묻진 못했다. 자신만만하게 씩 웃으면 어쩐지 그 얼굴이 늘 슬퍼 보이던 눈이, 아예 내려앉아 무언가 목에 걸린 것을 삼키고 있었다. 웃으려고도 하지 않는 입매가 파르르 떨더니 전혀 동떨어진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냥 나중에 줘. 너 가지던가."
쉽게 소유를 포기해 버리는 특유의 그 말투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정말? 하고 기뻐서 대답하기엔 안될 것 같아, 선규는 잠시 머뭇대다 고개를 도리질쳤다.
"아냐, 나 그거 필요없어. 돌려줄게. 이따가, 이따가 올라가서 가져올게."
여기 있으라는 말을 영민이는 참 어렵게 하는구나. 은연중에 자꾸만 확언하듯 되뇌이면서 선규가 웃었다. 그러니까 그만 웃어. 뭐든 맘대로 해. 아직까지도 제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단 걸 늦게 알고, 선규는 그 더운 손 위에 마찬가지로 덥기만 한 제 손을 얹었다.
"있잖아, 영민아. 지금 우리 집에 아버지 안 계신다?"
우산을 잡은 손이 툭 그걸 놓쳤는데도, 우산대가 어깨에 걸려 뒤로 기울어진 채 동그란 그림자가 두 사람을 동시에 가렸다. 뜬금없는 소리에 영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없어. 우리 집 개도 안 키워. 지금 아무도 없어."
이젠 웃을 법도 한데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손에 잡은 힘이 풀어져, 선규가 가만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가출했으면 여기 와도 돼."
"…병신아, 내가 너냐."
그제서야 한 마디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껏 갈라진 끝을 감추며 튀어나왔다. 선규는 영민이 완전히 제게서 무게중심을 빼앗아 가기 전에 그 품을 안고 도닥였다. 우산이 휙 미끄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날은 흐렸다. 비는 오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훌쩍거리지 않는 듯 영민이 말을 삼켰다.
"오늘 비 온다면서…. 왜 안 오냐, 쪽팔리게."
어깨에 목을 기대고 선규가 아무 이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장가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