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그 뒤로 시간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부스러지는 콘크리트 가루가 골조만 남은 학교 건물 밖으로 뿌옇게 흐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유리가 없는 창문틀에 기대 선 사람의 얼굴은 역광을 받아 검었다. 그 시선 맞은편에 무덤덤한 목소리를 듣고도, 파들거리는 입술을 가만히 깨물며 상욱이 다른 말로 되뇌었다.
"……경찬아."
다가가려는가 싶게 한 걸음 떼어놓으려던 찰나, 커튼을 붙잡은 손이 미끄러졌다. 위험하게 기울어진 몸이 휘청하고 다시금 기우뚱했다. 어깨를 떨면서 차마 바닥에 붙어버린 발을 꼼짝하지 못하고, 상욱이 애써 말을 이었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경찬아. 미안…….”
“상욱아.”
애초에 들던 햇빛이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그림자에 덮여 있던 경찬의 표정이 얼핏 내보였다. 웃지도 않는 얼굴로 짤막하게 말을 뱉는 얼굴이 싸늘할 만큼 냉정했다.
“너무 늦었어. 난 이미 죽었어.”
“…하, 진짜 미치겠네. 존나 늦었다니까.”
두 남자가 마주 선 고요한 풍경 밖으로, 톡, 탁, 톡탁 초침이 지나가는 회중시계를 들고 선 용철이 제풀에 초조해 중얼거렸다. 수면제의 효력이 다하기까지 앞으로 1분 남았다. 수를 헤아리는 순간에도 초침이 빠르게 숫자를 지나쳐 59초, 58초……. 용철은 문틀을 잡고 슬쩍 다 허물어진 교실 안을 들여다봤다.
“이선규 이 새낀 어딜 가서 아직까지 안 와?”
완전히 창문 틀에 올라선 사람 그림자가 꿈인 줄 알면서도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바람 한 번 불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서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상욱을 내려다보며 경찬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
커튼줄을 쥐고 있던 손을 탁 놓고 눈을 감은 채, 경찬이 허공으로 기대듯 몸을 천천히 뒤로 젖혔다.
“…29, 28, 27….”
우르릉, 하고 요란하게 무너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쏟아진 탓에 용철은 고개를 돌렸다. 복도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별관 건물이 무너져내려 뿌연 연기가 매캐하게 운동장을 덮었다. 땀이 밴 손을 바지춤에 대충 닦고 용철은 시계 용두를 당겨 빠르게 돌렸다. 용심이 망가진 것처럼 초침은 빠르게 전진할 뿐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꿈이라는 신호를 확인하고 용철은 눈을 질끈 감은 뒤 벽에 몸을 기댔다.
“…5, 4, 3…….”
남은 초는 입 밖으로 셀 수 없었다. 경찬아, 하고 누가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비명처럼 멀어졌다. 온 중심이 뒤로 기울면서, 마지막으로 눈을 떠 정면으로 바라본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새파랬다.
“야, 이 정신빠진 새끼야. 학교? 갈 곳이 없어서 학교?”
가물가물한 눈을 뜨자마자 반쯤 켜진 알전구가 흐릿하게 시야 중앙에 들어왔다. 카랑카랑하게 외쳐 대는 화경의 목소리가 곧바로 용철을 향해 쏟아지는 새에, 선규는 안락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게 당장 생각나는 데가 거기뿐인데 어떡해.”
“꼭 골라도 하필이면 저 사람…!”
목소리가 높아지려다 선규와 눈을 마주치고 화경은 말끝을 흐렸다. 선규는 무의식적으로 제 뒤를 돌아봤다. 낡은 침대 위에서 막 깨어난 상욱이 머리를 부여잡고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 틈에 용철이 목소리를 낮춰 화경에게 대꾸했다.
“솔직히 우리 준비할 시간도 별로 없었잖아.”
“…….”
“…아키텍트도 없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복잡한 걸 설계해.”
화경은 짜증스레 손으로 제 짧은 머리를 털어내면서 몸을 돌렸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선규가 조용히 말을 붙였다.
“화경아 미안, 나도 뭐 찾아낸 게 없다.”
“…괜찮아. 쟤 말마따나 시간도 부족했고.”
영 마음이 불편한 것처럼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화경이 씩 웃으면서 덧붙였다.
“정 신경 쓰이면 저 사람한테나 좀 가봐.”
그러고는 성큼성큼 창고를 나가 버리는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 선규는 화경이 가리킨 대로 침대에 걸터앉은 상욱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몽롱한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나 선규가 발소리를 죽여 그 옆으로 다가갔다.
“저기, 요…….”
맞은편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의자가 너무 멀어 머뭇거리는데, 상욱이 대뜸 벌떡 일어났다. 옆에 걸쳐둔 정장 겉옷을 낚아채 들고 막 저를 비켜가려는데 선규가 말을 내어 붙잡았다.
“그게 처음 꿈에 들어가면 그러기도 해서, 요.”
“…….”
“뭐 머리도 좀 아플 수 있고, 며칠 잠이 좀 안 올 수도 있고.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하고 저희한테 의뢰를 하신 걸 테니까 뭐 다 알고 있겠지만….”
'사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식의 봄 (0) | 2015.08.09 |
---|---|
나와 너의 파편 (0) | 2015.05.24 |
가출 스터디 (0) | 2015.05.24 |
가라앉는 날 붙잡아줘 (0) | 2015.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