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 중에 맨 처음이었다.
천사로 사는 몇 가지 방법
피그말리온 (2)
망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전신을 뒤덮은 돌가루가 매캐하게 피어올라 루카는 몇 번이고 마른기침을 했다. 잘못이라면 문 하나 잘못 열었던 게 다였다. 작업실로 통하는 뒷문을 연다는 게 문고리에 걸려 있던 빗자루를 쓰러뜨리면서 연달아 부서진 석고상을 넘어뜨렸던 것이다. 그가 진저리치게 싫어하는 굉음을 내면서 산산조각난 먼지가 온몸을 새하얗게 뒤덮은 마당에, 거의 도망치듯 그 현장을 빠져나온 루카는 결국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고개를 숙여 내려다봤더니 구둣발부터 손바닥까지 온통 재투성이가 따로 없었다. 이 쪽팔린 꼴을 누가 볼까 두려운 건 둘째치고 찝찝함에 짜증이 났다. 대충 손끝으로 옷소매를 당겨내 겉옷을 슬슬 벗고, 루카는 두 손을 최대한 몸에서 멀찍이 뻗어 툭툭 털어냈다. 손가락 한 번만 튕겨도 싹 깨끗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천사의 권능에 왜 그런 건 없는지. 풀풀 날리는 돌가루에 고개를 돌리고 루카는 연신 구시렁거렸다.
“…아, 이건 또 왜 안 빠져.”
더러워진 손에서 꽉 낀 반지를 빼내려는데 애꿎은 손가락만 뽑힐 것처럼 아프고 빠지질 않았다. 안 그래도 잘 안 맞는 손가락에 억지로 끼워넣었던 걸 빼려니 쉬울 리가 없었다. 온통 피부가 벌개지도록 이리 돌리고 저리 당겨보며 낑낑대는 사이, 눈앞에 드리워지는 키 큰 그림자에 루카는 흘끗 고개를 들었다.
“뭐 해, 루카?”
또 싱글거리는 미소. 단번에 기분이 상한 루카가 얼른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자, 그걸 놓치지 않고 발렌티노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거 뭐야?”
“신경 끄고 갈 길 가라.”
루카가 목소리까지 깔고 슬슬 시선을 피했는데도 발렌티노는 집요하게 그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렸다.
“벼락맞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가. 조각상이랑 진하게 뽀뽀라도 했어?”
“아니, 그게 대뜸 먼저 와서 부딪혔거든?”
옷깃에 가려진 목 밑에서부터 천천히 열기가 오르는 걸 느끼면서, 루카는 필사적으로 숨긴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반지를 빼 보려고 애썼다. 반지는 중간에 걸린 채 빠지지 않고 살갗만 자꾸 비틀려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표정을 좀 찌푸렸나 싶을 때였다.
“다쳤어?”
발렌티노가 갑자기 낯빛을 싹 굳히더니 대뜸 제 손을 낚아챘다. 줄곧 장난스럽게 굴던 것과는 별개로 손바닥을 세게 잡아쥔 악력에 루카가 움찔하자, 발렌티노는 퍼뜩 그 손을 놓았다. 그가 미안한 기색으로 한 발 물러서는데, 루카가 무안해진 손을 선뜻 내밀었다.
“손 좀 씻으려는데 반지가 안 빠져.”
이럴 때 유난히 짤따랗게 보이는 손가락이 온통 먼지 범벅이라 더 투박했다. 시선이 닿는 기분이 따끔따끔해 루카는 괜히 애꿎은 손을 쥐었다 폈다.
“내가 맨날 다치기만 하는 줄 아냐?”
그가 구시렁거리듯 덧붙였다.
“걱정 좀 그만….”
“안 맞는 손가락에 억지로 끼우니까 그렇지.”
검지손가락에 빠듯하게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던 발렌티노가 툭 말했다. 튕겨져나오는 문에 부딪혀 아프긴 제법 아팠는데,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응석 부리는 것처럼 손등이 괜히 욱신거렸다. 안 맞는 게 당연했다. 그분에게 반지를 받은 첫날, 그는 제 둘째 손가락에 반지를 가까스로 밀어넣고 뺀 적이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천사가 반지를 낀 위치였으니까 그게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다.
“줘봐, 손.”
또 한소리 하려나 싶어 쳐다봤는데, 발렌티노는 별말 없이 자기 손을 먼저 내밀었다. 루카는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된 기분으로 주저하다 왼손을 내줬다. 길고 얇은 손가락이 제 손등을 부드럽게 쥐고 반지를 살살 당겨 빼냈다. 힘을 푼 탓인지 반지는 생각보다 순순히 빠졌다. 반지 안을 들여다보던 발렌티노가 제 손 안에서 슬쩍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약하게 붙잡았다.
“…어?”
루카가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사이, 발렌티노는 그 손에 조심스레 반지를 도로 끼워넣었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밀려들어간 반지가 그새 따뜻하게 덥혀져 있었다. 발렌티노가 놓아준 뒤에도 한참 동안 두 손을 어색하게 들고 있다, 그는 약지에 옮겨 온 반지를 조심스레 만지작댔다.
그걸 내려다보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뜻밖의 반응에 발렌티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 전에 손가락을 맞춰 본 여인의 돌로 된 차가운 살갗이 생각나, 루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좀 우스운 얘길 들었는데, 이거 보니까 생각나네.”
“응?”
“됐어, 말 안 할래.”
하필이면 왜 또 그 손가락일까. 사랑의 혈관이니 영원한 언약이니 하는 미신적인 말을 믿는다면 그 자체로 신의 영광인 천사에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일지 몰랐다. 루카는 심술맞게 입술을 꾹 다물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발렌티노가 피식 웃었다.
“뭐야, 싱겁긴.”
그는 손을 올리더니 루카의 머리에 아직도 새하얗게 얹혀 있는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머리카락을 후 불어내는 입김에 머리끝까지 쭈뼛 서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발렌티노는 손을 거두고 돌아서는가 싶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끔은 티내지 못해 들키지 않은 것들이 많아 더 서러웠다. 루카는 제 옷매무새를 마저 정리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온통 더러웠던 바지며 옷소매가 깨끗했다. 이상하다 싶어 머리카락을 한 번 털어 봐도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았다.
천사의 권능이 뭐길래 이런 건 안 가르쳐줘 놓고. 루카는 애꿎은 제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려 놓고 허탈하게 웃었다.
“너 미쳤어?”
루카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발렌티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좁은 복도 끝에 딱 하나 켜진 등불이 그림자를 기이할 만큼 길게 드리웠다. 걸음을 빨리해 루카가 다급히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이거 아니야.”
“비켜.”
“너 후회할 거야, 미친 짓이라고!”
빽 소리지르는 그에게 발렌티노가 고개를 돌렸다. 루카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뒷걸음질쳤지만, 색소가 옅은 눈동자는 단호하다기보다 간절했다. 그 눈빛이 그는 되려 무서워 소름이 끼쳤다.
“왜?”
발렌티노가 되물었다.
“너도 들었잖아, 기도하는 소리.”
그대로 지나쳐가려는 그의 팔을 루카는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그런 눈은 처음 보았다. 지나친 감정이 둑을 넘다 못해 홍수처럼 흘러넘쳐 그를 사로잡아버린 것 같았다. 인간의 감정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발렌티노는 오직 기도소리에 담긴 간절함 하나에 매료되곤 했다. 인간은 눈뜬 장님 같아서, 자신이 비는 소원이 가져올 결과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 천사에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알면서도 매번 요동치는 당장의 감정에 붙들려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당연히 들었지, 그래서 더더욱 안돼.”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발렌티노가 제 옷소매를 붙잡은 루카의 손을 도로 잡았다. 떼어내는 대신 약간 축축해진 손가락이 그 손등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루카, 듣고 있어? 아름답잖아.”
그는 꼭 그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말했다. 계속 듣고 있자면 그마저도 넘어가버릴 것 같아서, 루카는 되는 대로 황급히 말을 막았다.
“아무리 너라도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금기야.”
발렌티노는 대답 대신 쉿, 하고 입술에 자기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루카가 대신 저 위를 흘긋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다 그분이 알면…….”
“보스한테 말할 필요도 없어. 내 힘이면 충분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루카가 입만 벙끗거리는 사이 발렌티노가 그를 비켜 앞서나갔다. 종종걸음쳐 그를 따라가는 내내 루카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이고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기를 반복하자, 결국 걸음을 멈추고 발렌티노가 그를 돌아봤다.
“잠깐이면 돼, 아주 잠깐. 하룻밤이야.”
루카는 가만히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둘은 복도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여인의 새하얀 몸이 드러나 보였다. 그 또한 며칠 동안 보아 알고 있었다. 완벽하게 완성된 작품을 앞에 두고 조각가는 절망했다. 곧 살아움직일 것만 같은 손짓, 탄력있는 몸과 밀어를 속삭일 듯한 입술을 앞에 두고도 그 여인은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바라며 무력하게 무너져버린 조각가를 보고 안타깝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가능과 불가능을 떠나 이건 선을 넘는 일이었고, 그는 두려웠다.
“…….”
루카가 뒤를 돌아봤을 때 발렌티노는 문 안으로 팔을 뻗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감은 눈꺼풀이 떨리고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 천사의 권능은 정제되지 못한 감정에 비해 아름다운 만큼 과분했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루카는 이어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창백한 돌조각의 표면이 홍조를 띈 피부로 번져 나가고, 단단한 알껍질을 깨고 나가는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온기가 돌았다. 멀리서도 벽을 깨뜨리고 숨이 터져나가는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불어넣자마자 순간에 고정되었던 손이 떨어져내렸고, 여인은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 천천히 발을 떼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쓰러지려는 여인의 몸을 받쳐 안고 조각가는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소리없이 울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루카.”
그가 귓가에 속삭였기 때문에 루카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단어들이 밭은 숨처럼 부서져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예쁘지?”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이었고, 루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사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듣고 있는 것 중 무엇이 더 아름다울지 그로선 가늠할 수 없었다.
“예술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지.”
더 이상 안을 엿봐선 안될 것 같은 정체모를 죄책감에 몸을 돌리려는데, 홀린 듯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서서 발렌티노가 중얼거렸다.
“…모두가 누군가의 작품이니까.”
그의 눈앞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천사가 신의 것이라면, 그는 자신이 누구의 손에서 잉태되었을지 궁금했다. 내려다보는 얼굴에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루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이 곱고 가느다란 손이 턱 밑을 감싸고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귓가로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살 쓸어넘기다, 발렌티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맞췄다. 루카는 밀어내지도 참았던 숨을 들이키지도 않은 채 갈 곳 잃은 손으로 그의 팔꿈치를, 어깨를, 그리고 목 뒤를 더듬다 이내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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