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기억을 뒤에 남겨두고 나아간다.
지상의 인간들은 지나간 일을 잊으면서 기억을 비우고 다시 채워 넣기를 반복하다 남겨진 조각들을 품고 사라진다. 영원히 살아가는 천사에게 기억은 어쩌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타인의 기억 속에 그 존재를 남기는 인간과 달리,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없는 것이 천사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잊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기억은 소맷자락에 튿어진 단추 따위와 달라서 한번 사라지면 그 빈자리조차 서서히 잊혀진다. 그런데도 자꾸 이해할 수 없는 부재감이 느껴져 기분을 짓누를 때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먼 시간 어딘가가 그렇게 신경쓰일 수 없었다.
분명히 무언가 두고 온 것이 있었다. 잊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기 어딘가에 중요한 게 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루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꾹 짚었다.
천사로 사는 몇 가지 방법
연장근무 (1)
“나 잃어버렸어.”
쟈코모가 볼멘소리를 하며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을 때, 루카는 선글라스를 닦는 데 열중한 채 슬쩍 한 뼘 반대편으로 옮겨 앉았다. 풀썩거린 옷깃에서 유화 물감의 옅은 기름 냄새가 풍겼다. 공방에 배어 있는 독한 향이 활짝 열어 둔 바람 냄새에 불쾌하지 않게 섞였다.
“선생님이 준 건데.”
“뭘?”
“목걸이. 끊어졌어.”
루카가 흘긋 시선을 주자 쟈코모는 꼭 쥐고 있던 손바닥을 펴 보였다. 얇게 세공된 은줄의 접합부가 끊어져 항상 매달려 있던 장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빠져 있었다. 정교하게 오므린 꽃봉오리 모양으로 잘 세공된 유리 장식이었는데, 곧잘 걸고 다녀 몇 번 눈여겨본 기억이 났다. 입을 쭉 내밀고 턱을 괴고 앉아 쟈코모는 엄지손가락으로 목걸이 줄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선생님한테 뭐라고 말하지?”
“말하긴 뭘 말해, 솔직하게 잃어버렸다고 해야지.”
루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쟈코모가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기운 없이 후우 뱉었다.
“……제일 좋아하던 건데….”
한숨 끝에 따라나온 말이 뜻밖이라 루카는 면박주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기껏해야 혼날까봐 울상인가 했더니, 딱 그 또래 애처럼 속상해하고 있는 건 영 눈에 밟혔다. 그러니까 주렁주렁 걸고 뛰어다닐 때부터 불안불안하더라고 속으로만 궁시렁거리고, 루카가 가벼운 위로의 말이라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찾아볼 수 없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천사잖아.”
쟈코모가 눈을 빛내며 올려다보자 루카가 말을 잘랐다.
“천사라고 물건 찾는 초능력 있는 건 아니거든?”
“……그래, 뭐. 나도 알아. 괜찮아.”
말로는 그래 놓고 하나도 안 괜찮은 표정으로 시무룩해 돌아앉는데 마음 한구석이 켕겼다. 빈 줄을 가지고 꼼지락꼼지락 손장난을 하는지 축 늘어진 어깨가 간간이 달싹였다. 루카는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진지하게, 이 세상에서 천재적인 예술가를 찾는 것과 고작해야 밀라노 한 도시에서 골목길에 떨어진 목걸이 조각을 찾는 것 중 뭐가 더 어려울지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 덕에 돌아온 쟈코모의 시선이 무릎에 올려놓은 제 손가락에 빤히 내리꽂히는 걸 모르고, 갑자기 닿은 손길에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반지야?”
“…야!”
반사적으로 손을 치우고 뒤로 숨기면서 루카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려 노려봤다.
“이거 엄청 중요한 거야.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누가 뭐래?”
루카가 옆으로 몸을 빼고 제 약지에 끼워둔 반지를 버릇처럼 소중하게 만지작대는 사이, 금세 삐친 얼굴로 쟈코모는 옷자락을 휘적대며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소중한 거면 깨뜨리지나 말던가. 깨진 거 다 봤는데.”
“뭐?”
“선생님한테 갈 거야!”
대답도 아닌 말이 제멋대로 돌아오더니 쟈코모는 혀끝을 내보이며 메롱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져 가도록 한참을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다 말고, 루카는 퍼뜩 고개를 내려 반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언제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나는 금이 천사의 문양을 가로질러 파여 있었다. 아주 얇고 미세한 균열이었다.
안 그래도 그날은 꿈자리가 제법 뒤숭숭했다. 물론 천사한테 애초에 수면이 필요하지는 않다. 연이어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잠깐이라도 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을 뿐이었다. 생각하기도 귀찮을 땐 다 모른 척하고 잠드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래 놓고 푹 잠들지도 못했다. 잠은 선택이지만 꿈은 랜덤이라는 건 조금 불공평한 처사였다. 어디까지나 조금. 신이 정해 놓은 천사의 행동방식에 불만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긴 그 피조물 중에 나사 빠진 놈도 있기는 했지만.
그래 그 발렌티노를, 하필, 몇백 년만에 처음으로 청한 단잠 속에서까지 보게 되다니 운도 지지리 없었다. 제발 신이시여, 듣고 계시다면 차라리 불면의 밤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한참 넋을 놓고 누워있다 보니 허리가 배겨, 루카는 목을 몇 번 돌리고 꾸물거리며 자세를 고쳤다. 기지개를 켜는 바람에 비스듬한 지붕을 따라 몸이 미끄러졌다. 떨어지지 않도록 무릎을 세워 중심을 잡고, 그는 팔을 뻗어 오른손을 쭈욱 폈다. 막 정오를 지난 환한 햇볕에 역광이 비쳐, 손가락 반 마디쯤을 차지하는 두꺼운 반지에 그림자가 져 보였다. 이 반지 때문에 계속 골치가 아팠다.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깨진 틈이 눈에 띄지는 않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상흔 하나가 제 잘못 같아 영 신경쓰였다.
아무래도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으로 신이 자신에게 하사한 물건. 물론 발렌티노의 손가락에도 여전히 같은 반지가 있는 걸로 보아, 모든 천사들이 당연히 하나씩 가지고 있을 징표쯤 되는 것으로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반지를 처음 받았을 때는 어땠더라. 모든 것의 시초, 완벽한 맨 처음 순간. 사명을 가진 하늘의 전령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자부심은 그깟 시간에 퇴색할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정말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탄생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존재는 없다. 살아왔다고 믿는 햇수는 사실 누군가가 가르쳐주어 알고 있는 어렴풋한 허수에 불과하다. 아마 꿈이 시작되면 그 출발점이 어디인지 절대 기억할 수 없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새는 눈 뜨면 처음 본 그 무엇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평생을 따른다는데…. 루카는 짧게 하품을 했다. 눈물이 고여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그 너머로 흐릿하게, 아까의 꿈 언저리에서 본 것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얼핏 스쳤다.
정말 그게 뭐였더라.
쿵, 하고 온몸을 울리는 큰소리에 루카는 그만 움찔 놀랐다. 지붕 밑 골목으로 과일 수레바퀴가 빠져 넘어졌는지 사과며 오렌지들이 와르륵 바닥에 쏟아져 구르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소름이 쫙 돋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본능적으로 따라오는 거부감이 목덜미를 타고올랐다. 순간 멈춰버린 숨을 도로 후, 뱉어내는데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와 또 한번 히익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여전히 겁은 정말 많구나.”
양 손바닥을 내보이고 와, 입을 벌려 짐짓 놀라는 얼굴을 따라하더니 신이 말했다. 선글라스 너머로 눈썹이 찡긋하고 찌푸려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다가, 루카가 퍼뜩 자세를 고쳐 섰다.
“…저, 저 여긴 어떻게…!”
“별 문제 없고?”
그가 건성으로 툭 내뱉어 물었다. 갑작스런 등장에 그대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루카는 되는 대로 떠듬더듬 대답했다.
“무, 문제, 아뇨! 전혀 없습니다. 그, 다 잘 되고 있고….”
그는 옷자락을 손끝으로 툭툭 털어내더니, 몇 발짝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참 아름다운 화가를 만났다지.”
“예, 무척 순조롭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덕택에 요새도 자주 얼굴 보고 있고.”
“…발렌티노도 절대, 절대로 끼어드는 일 없고…. 예?”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에 몸이 굳어 루카가 말끝을 흐렸다.
“긴장 풀어.”
어깨에 탁 얹히는 무게감에 저도 모르게 움찔해 놓고, 그는 애써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말을 이었다.
“그, 실은 저번에 아주 잠깐 방해한답시고 몇 번 어슬렁거리긴 했는데, 별 일은 없었구요…. 갑자기 발렌티노는 왜….”
“그래, 그놈 얘기를 좀 했으면 좋겠어.”
다른 데엔 영 관심없다는 듯 시선을 불분명하게 흐리던 신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흠칫해 도로 시선을 돌리고, 루카는 무심코 등 뒤로 손가락을 오므려 감싸쥐었다. 반지의 갈라진 틈이 까끌까끌하게 손바닥 안으로 깊숙이 눌렸다.
“…발렌티노.”
신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려 발음한 그 천사의 이름이 마땅히 받은 저주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고왔다. 잠깐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가, 이어지는 말에 루카는 그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기억엔 항상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네…! 아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 이것도 엄청 중요한 사명이지만….”
“네가 해줬으면 좋겠는 일이 있다.”
루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연신 눈만 깜박였다. 신은 몸을 돌려 이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손끝에 묻은 먼지를 후 불었다. 그대로 가만히 입술을 매만지다 흘끗 돌아보는데, 그 시선이 렌즈 너머로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겠군.”
발렌티노, 발렌티노, 신이시여. 이런 순간에도 지긋지긋하게 듣는 이름. 하필 지지리도 엮이기 싫어하는 녀석과 묶인 일인데도, 그분이 자신을 찾아와 한 말에 다른 건 아무래도 중요치 않았다. 지금보다 더 중요한 일, 그 한 마디만 똑똑히 듣고서 루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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