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발렌티노는 얼핏 고개를 갸웃했다.


수많은 것들을 가리키던 단어로 어떤 하나를 가리켜 부르면 그건 이름이 되고, 그 이름은 제법 큰 힘을 지닌다. 예컨대 천사들은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불리는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천사들이 유난히 청력이 좋다, 그런 건 또 아니고. 귀로 듣는다기보다는 추위와 더위를 알듯 몸으로 느껴지는 데 가까웠지만, 이름을 듣지 않고 ‘느낀다’는 표현엔 아무래도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기도소리를 듣는 거랑 비슷한 원리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면서 발렌티노가 말했다. 그는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고, 등 뒤로 활짝 열린 창문에서는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퍼진 사다리꼴 모양으로 조각난 빛이 바닥에 걸렸는데, 그 위로 천사가 앉아있는 그림자만 새까맣게 가렸다. 볕이 좋을 때면 화가는 커튼을 모두 젖히고 분주하게 화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에 햇빛 냄새를 가득 메우곤 했다. 방금 하얗게 씻어말린 붓을 내걸며 다빈치가 물었다.

“나는 이름 같은 거 몰랐는데?”

그는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가, 쏟아지는 햇빛에 코끝을 찡그리더니 에에취, 재채기를 했다.

“그건 우릴 부르는 기도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예전에 쓰던 호칭이 튀어나온 걸 정정하려다 그만두고 발렌티노는 미간을 콱 찌푸렸다. 손수건을 꺼내들고 휑 코를 풀면서 다빈치는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어깨를 으쓱했다.

“완벽하게 똑같진 않아. 일종의 비유지. 둘 다, 듣기 싫다고 귀를 틀어막고 있어도 이 속에서부터 느껴지거든.”

꼬아 앉았던 다리를 풀고 제 가슴께를 손으로 두어 번 두드리며 발렌티노가 말을 이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기도소리를 듣는 것이 천사의 의무라면, 이름에 반응하는 건 천사로 만들어질 때부터 타고난 본능이었다. 이름만 들리면 자다가도 반사적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개처럼, 저 위에서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부터가 참 이기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거 참 피곤하게 사네.”

다빈치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는 이제 물기가 마른 화구통을 차곡차곡 크기대로 쌓고 있었다.

“뭐 천사들 중에서도 이런 걸 모르는 놈이 있긴 해.”

턱을 괸 채 손가락을 까닥이다 말고 발렌티노가 말했다. 영 못마땅하다가도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슬쩍 웃음이 나곤 했다. 그렇게 싫은 티를 내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이름을 불러대는 통에 어디 있는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멍청한 천사의 이름이 바로….

“…루카.”

이래 봤자 그 잠 많은 녀석은 퍼뜩 자다 깨서 누가 내 욕을 하나, 하고 귀나 후빌 게 뻔했다.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던 걸 들었는지 다빈치가 문득 말을 받았다.

“어때?”
“음?”
“그 천사. 괜찮은 천사인 게 맞아?”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화가의 찌푸린 미간이 제법 진지했다.

“하필 그 애 앞에 나타나선….”

그는 말끝을 흐렸다. 변명이라기엔 이미 주워담기 늦은 걱정이었다.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발렌티노가 이내 씩 웃었다.

“괜찮긴 해도 멍청한 놈이야.”
“순서가 좀 바뀐 거 같은데.”

코끝까지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을 달랑달랑하게 걸치고 다빈치가 짐짓 의심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위험한 짓 할 만한 녀석은 아니거든.”

그 덕에 애 둘만 물가에다 내놓은 것 같아서 좀 불안하긴 해도. 뒷말은 삼키고 발렌티노가 대뜸 덧붙였다.

“못생겼잖아, 나보다.”

다빈치는 못미덥게 고개만 내젓더니, 손수건을 꾸깃꾸깃 집어넣고 긴 옷자락을 휘적대며 제 할 일을 하러 분주하게 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꼬마가 그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하는 얘기에 곧잘 천사 얘기가 섞이곤 했는데, 대충 들어넘기면서도 신경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바보 천사에 웃음 헤픈 어린애라니 충분히 걱정할 만한 조합이긴 했다.

“볼 수 있을까? 스케치.”

발렌티노가 창가에서 화실 안으로 훌쩍 뛰어내리며 물었다. 펄럭대는 옷깃을 휙 쳐내고 그는 캔버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가?”
“…아, 그건 아니야!”

그 손이 뒤집어 놓은 캔버스에 막 닿으려는 순간 다빈치가 종종걸음쳐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손등을 매섭게 후려치기 전 얼른 손을 거두고 발렌티노는 뒤로 물러섰다.

“아직 시작 안 했어. 좀더 기다려.”

손사래를 치는 다빈치를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삐죽댔다.

“얼마나 기다려야 돼? 지금 눈앞에 있을 때 좀 해봐.”

자기 턱 밑에 손등을 받쳐대고 싱끗 웃는 걸 코앞에서 보고 다빈치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에헤이, 이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야.”
“완벽한 피사체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아우, 계속 이럴 거면 가. 이제 나가, 나가라니까 쫌!”

붓을 치켜든 화가의 기세에 순식간에 문간으로 내몰린 발렌티노는 양 손을 들어 항복의 표시를 해 보였다. 경고조로 붓끝을 세워 얼굴에 바짝 대고 빙빙 휘두르다 말고, 다빈치는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 아예 그걸 옆으로 치워 놓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건 거짓말일 게 뻔했다. 밤새 그리다 만 스케치가 구겨지고 버려지는 걸 며칠 지켜봤던 것이다. 발렌티노는 잠자코 옆으로 물러나 화실 구석에 미처 정돈을 마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놓아둔 선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

복잡한 설계도면 종이 밑으로 뭔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화가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 슬쩍 손가락으로 종이를 들췄다.

유리를 얇고 정교하게 세공한 작은 장식들이었는데, 몇 개는 모서리가 실수로 잘못 깎여나가 따로 모아둔 모양이었다. 나머지 완성품들엔 그 연결고리마다 작은 실매듭이 묶여 있었다. 다 엮으면 베네치아에서나 유행할 법한 제법 화려한 목걸이가 될 것 같았다. 색을 입힌 유리조각에 사선으로 굴절된 빛이 빗방울 같은 그림자를 바닥에 흘려 놓았다. 눈에 띄기 전에 도로 덮어 놓으려다, 그는 문득 잊고 있던 다른 곳에 생각이 미쳤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마자 뾰족한 모서리에 손끝이 찔려 따끔했다. 며칠 전에 길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 꼬맹이 행동반경이 워낙 넓어서, 그걸 발견한 곳도 시내에서 가장 큰 분수가 있는 광장에서 십여 분이나 걸리는 골목이었다. 주워서 공방에 돌려놓으려던 걸 깜박하고 주머니에 계속 넣고 다닌 게 언제부터였는지 벌써 가물가물했다.

떨어뜨리면서 살짝 깨졌는지 꽃봉오리 안으로 살짝 금이 가, 그 틈으로 가짜 물방울 같은 흠집이 잡혔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장식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어깨 너머로 다빈치가 불쑥 고개를 디밀었다.

“뭐 해?”
“…….”
“발렌티노?”

이름을 불리고서야 고개를 들어 화가를 돌아봤다가, 발렌티노는 죄지은 것마냥 뜨끔해 얼른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방금 그거 뭐야?”

다빈치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집요하게 물었다. 또 꽉 쥐면 금간 곳이 부스러질까 조심스레 받쳐든 채, 발렌티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뭐가?”
“뒤에 뭐 숨겼잖아.”
“아까 나가달랬지, 난 이제 정말로 가 보실까.”

손짓 몇 번에 대화를 무르고 은근슬쩍 자리를 뜨려는데 다빈치가 그 앞을 대뜸 가로막았다. 둥그런 눈매를 세모꼴로 뜨고 그가 짐짓 목소리를 깔았다.

“그거 어디서 났어?”
“아니, 이게 어쩌다가 내 손에….”
“허, 설마…!”

화가는 짧게 한 마디 뱉더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몇 분 안 되는 순간 동안 제멋대로 무슨 상상을 했는지, 말릴 틈도 없이 옆에 치워둔 대걸레를 냅다 집어들기까지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당장 안 나가? 지금 제일 위험한 놈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서 남 얘기를 하고 앉았어, 나가! 오늘은 여기 얼씬도 하지 마!”

바락바락대며 긴 걸레자루를 휘두르는 통에 얻어맞기 전에 급히 몸을 피하느라 억울한 스토커 누명을 벗을 틈도 없이 발렌티노는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나왔다. 하여튼 쓸데없이 근심만 많은 저 멍청한 천재 같으니. 같이 쓸 수 없는 수식어를 아무렇게나 붙이던 발렌티노는 한참 멀리 떨어진 지붕 위에 걸터앉아서야 한숨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저 화가의 히스테리가 사그라들 때까지 초상화는커녕 멀찌감치 새 구경이나 하고 있어야 할 터였다. 어쨌든 시간을 두고 해야 할 걱정거리라면 그도 하나쯤 있지 않은가.

신이 천사의 이름을 말했다. 제 이름이 불린 건 크게 두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루카였다. 직감이 맞다면 두 사람이 같은 곳에서 같은 시간에 함께 있던 게 분명했다. 신이 일부러 루카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는 건 노골적인 경고에 가까웠다.

무슨 얘기가 오갔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겠지만, 발렌티노는 유리조각에 긁혀 약하게 피가 맺힌 손바닥 안을 내려다봤다.




천사로 사는 몇 가지 방법 
연장근무 (2)
 


졸졸졸 떨어지는 물 위에 끝없이 동그란 파동이 생겨 넓게 번져나가고, 햇빛이 통통 튀어 영롱하게 빛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분수 바닥엔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하나둘 던져 넣은 은이며 금화들이 잔뜩 깔려 물살 퍼지는 대로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천사들은 움직이지 않고 조각된 악기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그치지 않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물에 비치는 빛무리만으로도 광장의 분수는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이자 프리즘이었다.

작은 아기천사가 들고 있는 물병에서는 끝없이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지만, 쟈코모는 망설임없이 가운데로 달려와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토르소에게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 아이는 입모양만으로 작게 인사를 건넸다.

쟈코모는 손을 조심스럽게 펴 안에 꼭 쥐고 있던 동전을 잠깐 들여다보다 이내 분수 안으로 휙 던져 넣었다. 퐁, 하고 유쾌한 마찰음이 나더니 동전은 얕은 물 밑으로 가라앉아 다른 소원들 틈으로 안착했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동전이 무사히 도달했는지 쳐다보던 쟈코모는 그 소리에 얼른 몸을 반듯이 펴고 질끈 눈을 감았다.

“…….”

잠깐 동안 입술을 달싹여 들리지 않는 말을 입 안에서 중얼거리더니, 눈을 뜨고도 아이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귓가로는 계속 물이 졸졸대는 소리와, 간간이 넘친 물방울이 튀어 옷소매를 적시는 감촉이 시원했다.

“사실은 금방 신님께 기도드리고 왔거든요.”

천사상의 고개가 기울어진 만큼 쟈코모도 머리를 살짝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사님한테도 얘기했다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물살에 밀려 동전들이 물 밑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꼭 마주 속삭이는 소리처럼 간질거렸다. 쟈코모는 손을 들어 천사의 눈앞에 한번 흔들어 보이고, 바쁜 걸음으로 옷자락을 팔랑대며 금세 저만치 뛰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