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릴미

리차네이존




부드럽게 휘어진 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들썩였다. 침대 헤드에 기대고 앉아 리차드는 네이슨의 얇은 호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에 걸치고 등을 따라 미끄러진 자신의 겉옷 한 겹 밑으로 맨살이 비쳤다. 베개도 없이 구겨진 시트에 머리를 묻고, 잠이 들었는지 그는 고르게 숨을 쉬었다. 네이슨의 숨소리는 늘 바닥에 깔린 것처럼 낮고 조심스러워서, 가끔 리차드는 그가 숨쉬고 있는지 부러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되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제 목덜미에 숨을 삼키며 가쁜 신음을 뱉던 그 모습이 네이슨의 맥박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릎 위에 얹어둔 책이 툭 하고 미끄러졌다. 미간을 찌푸리고 리차드는 허리를 숙여 아래로 떨어진 책등을 붙들었다. 끼익, 침대 틀이 삐걱대는 소리에 그는 무심코 움직임을 멈췄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자 네이슨은 여전히 변화 없는 템포로 간간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리차드는 도로 몸을 뒤로 기대었다. 그가 다시 읽던 곳을 찾아 책장을 넘기는데, 다시 한 번 끼익, 하는 소음이 비집고 들었다.


"…씨이발."


그는 낮게 욕을 짓씹어 뱉고, 책을 탁 소리나게 덮었다. 문간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끔이 열린 문 뒤로 사람 그림자 하나가 굳어 서 있었다.


"문틈이나 엿보는 쥐새끼 주제에 뻔뻔스럽긴."

"오랜만에 들어왔으면 형한테 안부 인사나 하라고, 엄마가."


대놓고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존이 대꾸했다. 재수없는 시선이 리차드의 표정 위를 더듬더니, 어느 순간에 아래로 떨어져 침대 언저리를 훑었다. 리차드는 목 뒤를 기어오르는 불쾌감으로 단박에 얼굴을 구겼다. 흘긋 시선을 들고 존이 씩 웃었다. 그는 순순히 문을 닫으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디밀어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형, 손님 있으면 문은 잠가두지 그래. 여자 끌어들인 것도 아닌데 말야."

"…씨발, 당장 안 나가?"


낮은 목소리로 리차드가 냅다 쏴붙이기도 전에, 말끝을 잘라먹고 문이 쾅 닫혔다. 큰소리에 움찔 놀랐는지 네이슨이 설핏 선잠이 든 눈을 깜박였다. 살짝 쉰 말투로 그가 어눌하게 물었다.


"……왜?"


멍청하니 풀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방향을 잃은 짜증이 치밀어, 리차드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신경 끄고 잠이나 자."


그가 침대에서 내려서자 네이슨이 몸을 도르르 굴려 의아한 시선으로 쫓았다. 또 그 특유의 불안한 표정으로, 안경 없이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찌푸리는 것이다.


"어디 가는데?"

"한 대 피러."


따라오지 말라는 게 역력한 투로 리차드가 짧게 답했다. 네이슨은 입을 다물더니 도로 잠을 청하려는지 한참을 시트 위에서 바스락댔다. 리차드는 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발코니 쪽으로 나왔다. 담뱃불이 당겼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더니 사나운 기세로 퍼붓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이 머리칼을 푹 적시고 바닥까지 툭, 툭 떨어졌다. 어깨를 타고 오한이 파르르 내렸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서야, 네이슨은 다시 팔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낡은 자물쇠가 안에서 걸린 뒷문이었다. 입을 벌려 그를 부르려다, 무엇이 목에 턱 걸린 것처럼 소리를 내지 못했다.씨발새끼야, 또 뒷문에서 내 이름 부르면 가만 안 둔다. 입술을 타고 빗물이 주륵 혀끝에 다셨다.


네이슨은 몸을 돌려 등을 벽에 붙이고, 젖은 주머니를 더듬어 줄시계를 꺼냈다.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지다 시간을 확인했다. 물방울이 튀어 하나 둘 맺히기 시작하는 유리 밑으로 초침이 톡, 톡 움직였다. 오 분만 지나면 약속한 아홉 시였다. 조금 기다리면 문을 열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살짝 웃음이 났다. 그는 뿌옇게 흐려 버린 안경을 벗어 옷깃으로 닦으려다, 소매마저 축 젖었음을 깨달았다. 물 탓인지 온몸이 무겁고, 떨리는 어깨가 맨벽에 부딪혀 딱딱했다. 추위 탓에 흐으, 흐 입술 틈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를 애써 삼킨다고 고개를 숙인다는 게, 무릎을 굽혀 문 옆에 내려앉았다. 그는 두 다리를 끌어모아 안았다. 기다림, 그리고 기다림.


덜걱덜걱, 빗장이 흔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네이슨이 고개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문 밖으로 삐져나온 구둣발이 낯설었다. 무심코 입술을 물었다가,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지금 아무도 없어요."


존이 문을 완전히 열고 말했다. 실내에서 풍겨오는 건조하고 탁한 먼지 냄새가 따뜻했다.


"…형은? 형은 없니?"

"이미 대답한 것 같은데."


네이슨의 말에 존이 대꾸해 왔다.


"다시 말하면, 기다릴 필요 없다고요."

"약속했어." 


그 한 마디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네이슨이 힘주어 말했다. 그는 손에 자국이 나도록 쥔 시곗줄을 들어 보여주려다, 뿌옇게 흐린 안경 때문에 그만두었다. 온도차에 김이 서린 유리알 너머로 존의 얼굴이 가려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내 입을 열어 그가 대꾸했다. 


 "안 들어올지도 몰라요." 


별 억양 없는 말에 툭 무언가 떨어졌다. 손바닥에 무게감이 사라진 것을 보니 시계였다. 허리를 굽혀 주우려는데 눈앞이 흐렸다. 바닥을 되는 대로 더듬다, 어깨를 쥐여지는 체온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 위에 줄시계가 얹혀 있었다. 받아서 고개를 들고, 네이슨은 빗물에 미끄러진 안경을 밀어올렸다. 입꼬리가 굳게 다물린 존의 표정이 희미하게 보였다. 까닭없이 목 언저리가 확 달았다. 시선을 피하고 물러나려는데, 에엣취, 재채기가 터졌다. 겉잡을 수 없이 추위가 밀려왔다. 입을 열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정작 입술 끝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


바닥에 걸친 불빛의 반경이 넓어졌다. 존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네이슨은 그걸 초대로 받아들였다.




존이 김이 오르는 찻잔을 내밀자 네이슨이 움찔 몸을 뒤로 뺐다. 타닥대는 벽난로 불빛이 그림자를 길게 늘여 놓았다. 젖은 옷 위에 그대로 모포를 걸친 탓에, 응접실 소파에 걸쳐 앉아서도 여즉 축축함이 남았다. 삐져나온 옷깃이 바닥 카펫 위에 빗물을 떨구며 진한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마신다고 말했으니까."


주저하던 손이 잔을 받아들었다. 손바닥 안으로 뜨거운 온기가 퍼지면서 그는 온몸을 오소소 떨었다. 막 끓인 찻물에서 올라오는 김에 입술을 녹이다, 네이슨이 목소리를 냈다. 떨림은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푹 젖은 듯 잠겨 나왔다.


"…폐, 끼친 거 같네."

"이 시간에 찾아오는 게 실례라면, 뭐 그렇죠."


존이 바로 대꾸하자 네이슨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이내 깨달았는지 시선을 떼어냈다.


"미안. 네 형 말이 생각나서…. 아니, 아니야."


리차드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마자 표정을 미묘하게 바꾸는가 싶더니, 존은 이내 그것을 눈에 띄지 않게 덮어 버렸다. 여전히 능글하니 웃는 낯으로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위층이 제 방이라서요."


네이슨은 모포자락에 눌린 머리만 끄덕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인지, 수긍의 의민지 존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단지 뒤따라 나온 말끝에 까닭모를 불안 같은 걸 읽었을 뿐이었다.


"그럼 들었겠다. 저번에도…."

"아뇨. 기숙사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됐어요. 방을 꽤 오래 비웠으니까."


이번에도 네이슨은 어물쩍 고개를 주억거리고 넘겼다. 꼭 그렇게 하라고 제 형에게 당부라도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뭘 시켜뒀는지는 몰라도, 그가 저와 말을 섞는 것 자체만으로도 리차드가 치를 떨 거라는 걸 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럴 거면 버려진 괭이새끼처럼 두지 말던가.존이 장작을 먹인 벽난로 쪽을 흘긋 바라봤다가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인데요?"


모호한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돌아오는 네이슨의 표정은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의아했다.


"여기서 잘 건 아니잖아요. 형 없으면."


탁, 탁 하고 마른 장작을 집어삼키는 불이 기분 나쁘게 신음했다. 그는 언제나 저 불이 싫었다. 한 번도 리차드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는 네이슨을 쳐다보고 재차 물었다.


"그 잘나신 리차드 로엡은 오늘도 위대하신 사상에 걸맞는 누굴 만나 밤을 새울 것 같은데."


존은 걸터앉았던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호를 그리며 비쭉하게 뻗어 나온 불빛의 범위를 구둣발로 밟았다. 키 큰 그림자가 화로 위를 덮는가 싶더니, 그는 이글거리는 불 안쪽으로 장작개비를 쑥 밀어 넣었다. 단번에 화르륵, 타오르는 불이 손가락을 잡아먹을 듯 부피를 키웠다.


"그런데도 재미없게 계속 기다리겠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존이 표정을 찌푸렸다. 네이슨의 시선이 목덜미에 간질간질하게 닿는 기분이 들었다. 존은 몸을 돌려 네이슨이 앉은 소파로 되돌아와, 빙긋 웃는 낯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아, 더 좋은 생각이 났는데."


잔을 들고 저를 올려다보는 네이슨에게, 그가 짐짓 허리를 숙여 물었다.


"…그쪽도 다른 누군가랑 시간을 보내 보는 거야. 언제가 좋을까. 당장, 오늘이라도 좋죠. 지금 아무도 그쪽을 찾지 않는 이 밤이라든가."


무릎을 살짝 굽힌 탓에 조금 치어다봐야 하는 눈높이에서, 그는 찻잔 위로 네이슨의 손을 덧쥐었다. 더운 것을 들고 있었음에도 그 체온이 몹시 찼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탓에, 붙잡힌 손 위로 뜨거운 찻물이 튀었다. 흰 데다 못해 추위에 질린 피부 위로 금방 벌겋게 자국이 남는데, 네이슨은 똑바로 치켜뜬 시선만큼은 좀체 피하지 않았다. 제 눈을 올려다보면서 무언가를 말할 듯 실룩거리던 입술이, 마침내 벌어져 띄엄띄엄 말을 이어붙였다.


"……참 많이 닮았어. 넌 리차드랑."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네이슨의 핏기 없던 표정에 설핏 웃음기가 서렸다. 그나마도 싹 거둬들여지더니, 그가 입술을 축이며 입매를 꾹 다물었다. 저 혀를 굴려 소리 내는 말이 괴물 같은 제 형이 아니었더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데 아냐." 

"뭐가요?" 

"씨발, 이 좆같은 새끼가!" 


쾅 하고 문고리가 벽에 부딪혀 튀어오르는 소리가 말을 잘랐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제 형의 발소리를 듣고도 존은 네이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던 말을 흘릴 듯 말 듯 벌어진 입술이 이내 굳게 다물렸다. 


 "…좀 늦었네."


네이슨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한 시간에 가까운 기다림을 조금이라고 말하는 투에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뒷모습만 보고선 알 수가 없었다. 걸음걸이는 똑바로 이쪽을 향해 오면서도 패배감과 열등 의식에 젖은 눈이 저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 존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그는 씩 웃으면서 어깨 한 번 으쓱하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병신. 머저리 새끼. 눈치도 없는 개자식." 


씩씩거리면서 누굴 가리키는지도 모를 욕설을 되는 대로 주워섬기고, 리차드는 여즉 그를 올려다보는 네이슨에게로 시선을 끌어내렸다. 손을 뻗더니 찻잔 탓에 뜨거워진 체온을 실어 그가 제 손을 잡았다. 손등이며 손목을 더듬던 목소리가 띄엄띄엄 졸음에 잦아들듯 말했다. 


"…손이 차. 추웠지." 

"잠이 오냐. 미친놈." 

"이제야 좀 안심하겠다…." 


조근조근 풀어지는 말소리며 팔에 실려 오는 무게감을 느끼면서 리차드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려던 말은 많았는데 저 낯짝을 보고 있자니 다 하잘것없었다. 그래서 그는 네이슨의 어깨를 툭툭 손끝으로 치면서, 고작 이 한 마디를 하고 마는 것이었다. 


"…올라가서 자라."


'쓰릴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My dear betrayer  (0) 2015.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