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즈

빌리스펙스





매주 목요일은 쟈코비의 가게에서 브랜디 가격이 잠깐 내리는 날, 휴일까지 다시 사흘이 남는 날, 그리고 마지막으로 뜻밖의 누군가가 찾아오는 날이었다. 

이번 주는 내내 흐렸다. 월요일부터 구름이 끼더니 화요일에는 결국 소나기가 왔고, 어제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하루동안 꼬박 빗속을 걸어다니는 건 꽤 우울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바빠지는 걸음 틈에서 축축하게 젖어들어가는 옷과 모자의 무게에 눌려 신문들이 젖지 않도록 온몸을 움츠려야 했다. 김 서린 안경 때문에 온 세상도 물에 푹 잠긴 것처럼 보였다. 가게 유리창에 몸을 붙이고 짧은 처마를 우산 삼아 떨어지는 빗물을 잠깐 쳐다보다가, 팔에 걸쳐둔 종이 무게를 깨닫고 도로 길거리로 뛰쳐나오면 금방 안경 위로 뿌옇게 김이 서렸다. 몸도 기분도 비맞은 낙엽처럼 처지는 그런 날이었다.

목요일의 손님이 들른 건 그 축축한 하루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너 내 양말 가져갔냐?”

부산스럽게 온 방 안을 뒤집고 다니던 두기가 대뜸 물었다.

“무슨 소리야, 뭐만 없어지면 내 탓이래.”
“아니면 말고.”

젖은 옷들을 치워놓고 한참 덜 마른 머리를 털고 있던 스펙스의 대꾸에, 두기는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나서도 계속 궁시렁거렸다.

“이상하네, 아까 나갈 때랑 물건 위치가 좀 달라진 거 같은데.”
“잃어버리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냐.”
“나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까 마이크도 자기 거 없어졌다고 한참 찾았어.”

문득 스펙스는 문고리에 걸어둔 여분의 자켓 주머니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길래 손을 넣었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오늘 무슨 요일이야?”
“목요일! 왜?”

벌써 계단을 뛰어내려가던 두기의 대꾸가 한참 아래에서 들렸다. 스펙스는 대답 대신 자켓을 구겨 옆으로 치워 놓았다.

결국 오늘도 그 낯짝은 못 볼 모양이었다.

목요일의 좀도둑은 대부분의 신문팔이들이 자리를 비운 한낮에 슬쩍 다녀갔다. 이틀 벌어 하루 배를 채우기도 어려운 신세에 훔쳐갈 것들이 있을 리 없었지만, 가끔 덜 쓴 노트나 조금 남은 물감 따위가 조금씩 사라지곤 했다. 스펙스는 지난 달부터 자신의 책상에 하나 꽂아둔 연필이 언제쯤 없어질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저번 주에는 나타나지 않길래 이제 슬슬 제대로 된 털 곳을 찾으러 갔겠거니 생각했는데, 가져간 게 하필 담배라니. 마지막으로 훔쳐 놓고 제법 아끼던 마지막 두 개피였는데 속이 쓰린 걸 차치하고서도 괜한 오지랖이 들었다.

딱 봐야 한 모금 제대로 태우지도 못할 꼬맹이 주제에. 창고 뒷문에 기대 서서 스펙스는 서랍 귀퉁이에 남겨뒀던 한 개피를 입에 물고 생각했다. 아직 하루가 시작되지 않은 새까만 하늘에 희뿌연 안개 같은 공장 연기가 번지고 있었다. 어렴풋한 새벽동에 새하얀 연기가 뒤섞인 회색 구름이 꼭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머리 위로 바짝 내려앉은 하늘에 숨이 막혀, 스펙스는 불붙다 만 꽁초를 버리고 구둣굽으로 비볐다.

공장 연기가 하루를 열면 일과가 시작되기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일 분이라도 더 자려고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쓸 시간이었다. 조금 있으면 잭의 목소리가 아이들의 잠을 깨울 테고, 그러면 이 잠깐의 여유도 끝날 것이다. 한참 전 잠자리를 떠나와 놓고도 아직 깨고 싶지 않은 꿈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때쯤 휙 하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스펙스는 눈을 뜨고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골목 몇 개쯤 떨어진 곳인지 소리가 건물에 부딪혀 희미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누군가를 쫓는 것처럼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뚝 끊겼다. 꼭두새벽부터 순찰대에게 걸리다니 누군진 몰라도 지지리 재수없는 놈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가까이서 내려다보고 계신 신이시여, 저 불쌍한 소매치기가 늙은 사냥개를 운 좋게 잘 따돌리게 해 주소서. 분명한 의미도 모르는 성호를 가슴팍에 대충 긋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고 막 돌아서려던 때였다.

골목을 돌아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이쪽으로 곧장 돌진했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거대한 사람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

갑자기 잡아당겨진 탓에 무게중심이 휘청했다. 몸이 뒤로 넘어지려는데, 제 입을 틀어막은 사람에게 부딪혀 얼떨결에 기댄 꼴이 됐다. 멀리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문을 열었고, 엉킨 채 떠밀려들어간 몸이 창고 벽에 곧장 부딪히고 나서야 문이 쾅 닫혔다.

부딪힌 충격으로 입이며 코를 아무렇게나 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가자 스펙스는 기침을 터뜨렸다. 찌부러진 안경이 또 부러지진 않았을까 겁이 나 얼굴부터 더듬어보다, 별안간 나타난 괴한이 아직도 눈앞에 서있는 걸 보자 화가 치밀어 발이 먼저 튀어나갔다.

“아, 아아…! 왜 그래요?”

퍽 소리나게 무릎을 걷어차이고 튀어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어렸다. 암순응이 덜 된 시야를 깜박거리자, 제 잘못도 모르고 억울한 표정이나 짓고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금방 벽에 처박힌 등이 얼얼한데다 뒷목에서 열이 확 치밀어, 스펙스가 한대 더 칠 것처럼 바짝 다가서며 되물었다.

“왜? 너 지금 왜냐고 물어봤냐?”
“한동네 식구끼리 돕고 살 수도 있지, 좀!”

두 손을 바짝 들어 보이고 빌리는 장난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얻어맞은 다리가 아픈지 살살 문질러 보다, 그는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었던 지갑을 꺼냈다. 안에 든 동전을 세어봐도 하루 밥값에 못 미칠 것 같았다.

“덕분에 한숨 돌렸네.”

빈 지갑은 바닥에 버리고 담뱃갑을 열며 빌리가 물었다.

“한대 피워도 되죠?”

그 때까지만 해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불한당을 멍하니 쳐다보던 스펙스의 눈이 문득 빛났다. 익숙한 포장에 럭키 스트라이크.

“내 담배.”
“…….”
“너 여기 한두번 들락거린 거 아니지? 내가 어떻게 건진 건데, 이 좀도둑놈이…!”

손을 뻗어 낚아채려는 찰나 빌리가 재빨리 팔을 들어올리는 바람에 또 휘청하고 말았다. 스펙스가 바둥거리며 팔을 휘저어 가까스로 옷깃을 잡아끄는 사이 빌리는 여유롭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피워도 되냐고.”

뭉개진 발음으로 빌리가 웅얼거렸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다른 쪽 주머니를 뒤지다 아무것도 없는지 그가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팔에 매달린 무게에 그대로 떠밀려 주춤거리다 스펙스는 아까 작별한 줄 알았던 벽에 도로 등을 붙였다.

몸을 바짝 붙인 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간질간질해 스펙스는 눈을 피했다. 안경이 코끝까지 미끄러져 시야각이 흐리고 좁았다. 벽에 파인 자잘한 홈에서 냉기가 새어나오는지 목 뒤에 소름이 쭈뼛 솟았다. 어디서 밤을 잔뜩 묻히고 왔는지 차가운 냄새가 훅 끼쳤다.

“불 좀 빌릴게요.”

변성기가 겨우 지났을까 싶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직 한참 앳된 어린애가 어디서 배웠는지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은 말투였다. 딴 생각에 빠진 사이 바지께를 더듬던 손이 주머니 안으로 슬쩍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를 제대로 골랐어야지. 스펙스가 그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미안한데 손기술은 좀 별로네.”

아쉽다는 듯이 손을 치우고 물러나 빌리는 입술 끝에 물고 있던 담배를 까딱했다. 그럼 그렇지, 어디 한참 구를 대로 굴러먹은 이 형님을 이겨먹으려 들어. 단박에 으쓱해져 스펙스는 남은 담뱃갑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하나 줘봐.”

빌리는 순순히 남은 담배를 갑째 넘겼다. 두 개 줄어든 건 적선한 셈 치고, 남은 숫자를 세다 말고 스펙스는 하나를 뽑아 입에 물었다. 그러나 정작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오일라이터를 찾으려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빌리를 쳐다보자, 그 애가 의기양양하게 손바닥을 펴 보이고 있었다.

“불 드릴까요?”

빌리가 씩 웃었다. 키만 컸지 영락없이 어린애 같은 미소였다. 어쩐지 담배 한 개피가 절실했고, 금요일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