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님이 보고계셔
순호영범
악몽이 말을 걸어 온다. 대답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외면한다. 품에 끌어안은 두 무릎만이 제 편인 것처럼 머리를 묻고 숨을 죽인다. 웅크린 작은 몸 하나마저 숨겨 줄 수 없는 그림자가 덜덜 떨리고, 창문은 새벽 바람에 무섭게 덜그덕거린다. 어디서부터 꿈이 시작되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그 경계선이 무너져내린다. 창문이 휙 젖혀지고 얇은 유리마저 사라지면 비바람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커튼이 사나운 괴물처럼 기이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휘날린다. 입을 커다랗게 벌린 것은 바람이고 밤이고, 밤은 또다시 악몽 그 자체가 되어 그를 집어 삼킨다.
형, 형. 어디 있어?
가지 마, 형.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꺽꺽이는 줄도 모르고 마구 팔을 휘젓는다. 형의 것이라 믿었던 그림자가 휙 사라지는가 싶더니 괴물의 것으로 변하여 아가리를 벌린다. 몸을 돌려 달아난다. 저리 꺼져, 다가오지 마. 살려 주세요, 날 좀 놔주세요….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진다. 고개를 돌린다. 누군가가 서 있다. 무릎으로 기어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끌어안는다. 그건 꿈처럼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온기를 느끼면서 흐느껴 운다. 마침내 완성된 짧은 단어 한 토막이 혀끝에서 토해져 나온다.
형.
안녕.
말간 얼굴로 침대에 앉아 손을 흔드는 게 류순호였다. 바로 그 류순호. 사고로 친형을 잃고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조울증까지 겪고 있는 스키조였다. 제 고집이 워낙 세서 누구 말도 듣지 않아, 교수부터 말단 인턴까지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그런 류순호가 왜 이 눈앞에 있느냐고. 이제 겨우 펠로우 과정에 들어선 파릇파릇한 정신건강의 한영범 앞에.
"302호 류순호 앞으로 네가 책임져라."
"그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같은 햇병아리가 단독으로 PTSD 환자를…. 안 그래도 심리적으로 불안정한데. 저보단 인지행동치료 전공한 조 선생 시키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지금 콜할까요?"
"조 선생 다음 주부터 수원에 있는 분원으로 간다. 거기 폐쇄병동이 어떤지 알지? 하루가 멀다 하고 탈출에 보호사 폭행에…. 니가 대신 갈래?"
"아, 아닙니다. 류순호 환자 제가 책임지고 지키겠습니다."
"좋아. 며칠 식사도 거부하고 잠도 안 자고, 형 데려오라고 소란을 피워서 간호사들만 생고생했어. CCTV에 한 선생 얼굴만 안 잡혔어도 큰일 날 뻔했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솔선수범해서 잘 좀 해보자구."
"믿고 맡겨 주십시오!"
등 뒤에서 톡톡, 두드리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문고리를 쥐고 붙박인 듯이 선 영범에다 대고 석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안 들어가고 그러고 계십니까?"
"아으, 깜짝아. 놀랬잖아!"
병실 안쪽을 흘긋거리다 말고 완전히 몸을 돌려 영범이 대꾸했다.
"니가 왜 여깄냐?"
"한 선생님 가시는 길에 이 신석구가 없으면 안 되… 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됐습니다. 누구 때문에 저까지."
영범의 흘기는 시선을 피하면서 석구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류순호는 어떻게 맡게 되신 겁니까? 쟤 간호사들 사이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시잖아요."
"밤늦게 라운딩하는데 층수 잘못 누르고 내렸어. 문 딱 여는데 있어야 할 환자는 없고 깜깜한데, 누가 내 다리를 덥석 잡는 거야. 형, 형 하면서…. 놀랐지. 놀랐는데 정신과 병동에서 그게 뭐 별일이냐. 가만 있다가 어깨 좀 도닥여주고 나왔는데. 그게 저기 찍혔을 줄 누가 알았겠냐?"
"이야, 그거 하나 때문에 저 류순호가 하루종일 한 선생님만 찾는다고. 진짜 대단하시네요."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리액션을 보이면서 석구가 영범을 안으로 떠밀었다. 자, 자. 얼른 들어가보지 않고 뭐해요. 얼결에 발을 내딛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문이 옆으로 쾅 밀려 닫혔다.
"…안녕."
등 뒤에서 엷은 목소리가 인사를 해 왔다. 어색하게 몸을 돌려 영범이 순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 안녕? 네가 순호구나. 하긴 저번에 봤지? 그땐 어두워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거든."
"이리 와서 앉아."
순호가 침대 모서리를 제 손으로 툭툭 치면서 영범을 불렀다. 동글동글하니 선하게 휘어진 눈매가 뚫어질 정도로 줄기차게 영범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병실은 4인실이라 꽤 넓었지만, 창가에 붙은 순호의 것을 빼고 나머지 침대는 모두 비어 있었다. 밤이면 돌아오는 발작적인 공황장애 때문에 공간을 나눠 쓸 수 없는 탓이었다. 영범은 순순히 그 옆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그 때까지도 순호의 시선은 줄곧 그의 움직임을 따라 영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깜박이지도 않는 새까만 눈을 마주보다, 무심코 영범은 눈감지 않으려 애쓰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아!"
깜박. 순호가 느닷없이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소리지르는 바람에, 영범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떠보니, 침대에서 일어난 순호가 조르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반쯤 가려 놓은 블라인드 앞에 둔 화병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버거울 만큼 가득 꽂혀 있었다. 손을 뻗는가 싶더니 순호는 망설임 없이 꽃들을 단번에 뽑아 냈다. 화병 바닥에 찰랑거리던 설탕물이 주르르 순호의 손을 타고 흘렀다. 침대 앞으로 돌아온 순호가 양손에 가득 쥔 꽃다발을, 불쑥 영범의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 형."
그리고 입가에 함박웃음을 띄웠다. 끈적끈적한 물이 옷자락을 타고 툭, 툭 떨어지는 걸 모른 채 영범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