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돈 크라이

븨백





……우주를 달려나가는 기차가 있다고 상상해 봐요. 헬륨과 수소, 타키온 연료로 행성을 떠나 다른 은하로 떠나는 사람들. 양자공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어요, 나노미터 단위의 얇은 유리들이 수십 장씩 겹쳐진 창문에 손을 대면 별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수두룩한 문장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몇 마디씩 널을 뛰었다. 간간이 입술이 마르는지 혀로 축이며 급하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백작은 턱을 괴고 구경했다. 한참 전에 내놓은 홍차가 오래 우러나 입이 썼다. 혀끝만 살짝 대 보고 그는 찻잔을 내려놨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V는 말을 멈췄다.

“어…, 지루한가요?”

몇 시간 만에 그제서야 백작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다 V는 제 눈앞에 있는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아올렸다. 시선은 백작에게 고정한 채 연신 흘긋거리며 한 모금 크게 삼켰다가, V는 예상치 못한 쓴맛이 그대로 턱 목에 걸렸는지 한참을 콜록거렸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그 웃음이 뜻밖에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코끝까지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을 바짝 밀어올리고 V는 앞으로 허리를 숙여 백작을 빤히 바라봤다.

“와.”

V는 짧게 중얼거렸다. 백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표정 다시 한 번만 해봐요.”
“왜?”

흥미롭게 눈을 빛내는 시선을 받으며 백작이 슬며시 웃었다. 이마의 반을 덮을 만큼 큰 V의 안경알이 다시 코끝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름답나?”
“당연히 아름답죠! 하지만 그런 말로는 부족해요. 문학적인 수식에 능하다면 당연히 셰익스피어를 인용해야겠지만, 저는 제가 좀더 잘 아는 분야, 이를테면 e의 파이 i자승 더하기 일이 영이 되는 것처럼, 불확정성을 뛰어넘는 가장 완벽한 미학에 빗댈 수밖에…….”

제풀에 목소리를 높이던 V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여전히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줄 모르는 맹랑한 괴짜같기도, 이럴 때 보면 마냥 어린애같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백작은 느릿하게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그런 찬사는 처음이야, 달링.”
“…어?”
“진심이야. 내가 살아오면서 들은 수만 가지 말 중에 가장 어렵고 독특한 칭찬이었으니까.”

V는 몇 번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글동글한 안경알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눈동자 색이 짙었다. 분명 거기서 실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차가 맛이 없었나?”

그가 받침 위에 도로 내려놓은 찻잔을 가리키며 백작이 물었다.

“아, 그건 아닌데 익숙하지가 않아서….”
“이해해. 맛이 쓰네. 슬슬 사용인을 바꿀 때가 됐나?”

백작은 말끝에 입맛을 다시듯 혀끝으로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그 모습을 눈으로 쫓던 V와 눈이 마주치자, V는 시선을 피하며 급하게 찻잔을 다시 들어 몇 모금 연달아 들이켰다. 도로 올라오는 쓴맛에 목 밑으로 기침을 삼키며 온 얼굴을 찌푸린 표정이 제법 못났다.

벌떡 일어나 진열장으로 향하더니, V는 잘 알지도 못하는 라벨들을 눈 찌푸려 헤집다 마음가는 대로 하나를 집어왔다. 괴짜 과학자는 넓은 저택 곳곳을 고작 이틀만에 제 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괴상한 몰골을 하고 하늘에서 뚝 떨어질 때부터 V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오백 년의 간극이라는 이질감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꼬마는 이제 잘 시간 아닌가?”

그가 가져온 와인병을 눈으로 흝으며 백작이 장난 삼아 물었다.

“…아니거든요! 꼭 누구 생각나게 한다니까.”

V가 궁시렁거리며 와인오프너를 꽂아넣는 동안 백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무너졌다. V는 무심코 그 시선의 끝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텅 빈 와인글라스에 비쳐,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결이 날카로운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굴 만날 때 먼저 한 잔 권하라고 하더라구요.”
“누가?”
“…어, 책에서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개팅의 모든 것’이지만.”

뒤로 갈수록 말끝이 쪼그라들었다. 백작은 잔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탁자 위에 가볍게 걸터앉아, V가 코르크마개와 씨름하고 있는 바로 코앞에 잔을 내밀었다.

네가 왜 지금 돌아왔을까?

동시대를 산다는 진부한 표현은 영생 앞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탄생부터 손에 잡히지 않는 죽음까지 모든 시간은 그에게 하나의 시대였다. 보름이 한 바퀴 도는 서른 날, 잉태의 열 달, 그리고 세는 것을 잊어버리는 몇백 년의 차이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지리했다. 그러나 부재의 시절을 그는 구분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나기를 기다렸다. 사랑한 적 없었던 상실을, 다시 주어진 기회를, 그래서 너를 기다렸던 것이다.

손 안에 무게감이 실리더니 반쯤 채워진 잔이 기울었다. V가 남은 와인을 따르는 동안 백작은 기포가 오르는 술잔을 쥐고 한 번 부드럽게 돌렸다. 그만 자리를 뜨려는데, 불쑥 제 옷소매가 힘있게 꽉 당겨져 잔 안의 내용물이 출렁했다.

“…….”

말보다 앞서 손부터 뻗었는지 V는 의뭉스럽게 떨어지는 백작의 시선을 잠시 멀뚱하게 마주봤다. 그는 머쓱하게 옷소매를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천천히 할 말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제시한 계약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어요.”

V는 표정을 찌푸리고 느리게 말을 골랐다. 고작해야 몇십 년이라는 시간은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짧았다. V의 손이 옷자락을 놓으며 온기를 묻혀 놨다.

“난 메텔을 사랑해요.”

그는 이미 돌아올 답을 알고 있었다.

“바보같아 보인다는 것도 아는데.”

그래서 그는 질투했다.

“이대로 잃어버린다면 후회할 것도 알아요.”

그는 이미 잃었고 그앤 곧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V가 앉은 의자 뒤로 부드럽게 팔을 둘렀다. 목을 타고 어깨에 얹힌 차가운 손이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V는 몸을 굳혔다. V는 목께로 더듬는 손을 눈으로 쫓다가, 끝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V의 목을 뒤에서 감싼 두 손이 서서히 조여들었다.

“…누가 당신의 사랑을 받았을까요?”

백작은 잠시 멈칫했다. V의 맥박 위에서 마주친 두 손으로 백작은 서늘하게 손가락을 감싼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순간의 질투였다. 그는 그 불가해를 느리게 빼내며 순순히 약속한 계약에 응했다.

모든 것이 끝나면 곧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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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0) 2015.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