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넘버 합작







따라서 상기 내담자의 정신감정을 의뢰하는 바입니다.
추신, 전일 전담병원으로부터 전달된 진단서를 동봉합니다.


 서류칼로 살살 풀을 긁어내면서 나는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4월 14일이었고, 시간은 막 열한 시를 넘기던 때였다. 학회에 여러 번 이름을 알린 뒤 내게는 종종 이런 편지가 하루에도 두어 통 오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병원에서 다시 다른 병원으로 인계되는 환자는 ‘상담’을 ‘권고’받게 마련이었으므로, 자기 발로 찾아오지 않는 이상 이 서류는 일 주일 안에 파기되기 마련이었다. 예약이 빈 오후는 따분했으므로 나는 문을 등지고 의자를 반쯤 돌려 앉아 창 밖을 흘긋거렸다.

 검은색 차가 한 대 건너편 인도에 바짝 붙어 섰을 때 나는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 깜박 잠들 뻔 했는데 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누가 주차된 차를 건드렸는지 삐-삐- 소리가 알람처럼 잠을 깨웠다. 벌떡 일어나 창을 내다봤을 때,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는 알 수 없고 검은 승용차 한 대만이 눈에 띄었다.

 그가 나를 방문한 것은 그 날부터였다. 간호사가 문을 두드리고 내담자의 파일을 건네주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 글은 나의 회고록에 가까운 만큼 모호한 기억에 의존한 내 묘사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고 싶다. 그는 곧 장례식에 갈 사람처럼 새까만 정장 안에 새하얀 셔츠를 받쳐 입었는데, 처음 의자에 앉기 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것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내 첫인사는 이렇게 상투적이고 딱딱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례적인 인사에 똑같이 형식적으로 대꾸하기에 그는 만만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나를 만나길 기대한 적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비꼬려는 뜻은 아니었겠지만 썩 기분이 좋은 말투도 아니었다.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그는 내가 손짓하기보다 앞서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내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상담 과정이 항상 유쾌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최대한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일관하기 위해 아까 맨 아래에 깔아 두었던 우편물을 눈에 띄지 않게 도로 빼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의외인 것은 맞습니다. 보통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치료를 선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까요.”

 다소 날카롭게 들릴 수는 있었겠지만, 나는 그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는 점에 희망을 걸었다.

 “사회와 편견은 둘 다 무시무시하지. 압니다.”

 그는 뒤로 기대 앉으면서 대꾸했다. 책 밑에서 억지로 당겨 내다 우편봉투 끝이 지익 찢어졌다. 나는 표정을 구기고 찢어진 조각을 엄지로 꾹 눌러 책상 아래의 쓰레기통에 조용히 밀어넣었다.

 “근래에는 일을 하십니까?”

 내가 묻자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일상적인 대화입니다.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이죠.”

 “저에 대해서는 그 종이 쪼가리에 다 나와 있을 텐데요.”

 그는 대놓고 손짓해서 내 앞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유감스럽지만 내담자의 신상 정보를 함부로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딱딱하게 대꾸했다. 내가 빈정이 상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잠시나마 아주 미묘하게 입술 끝을 말아올렸다. 그러나 나온 말은 생판 달랐다.

 “그럼 그쪽이 한번 추측해 보십시오.”

 그 말투가 농담처럼 들리지도 않을 만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나는 하마터면 대답할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지금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내가 기적 같은 걸 바랬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선에서의 논리적인 추론을 말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잠깐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창문 밖으로 정오의 해가 옆으로 기울면서 햇빛이 그가 앉은 발치까지 살금살금 들었다.

 “일상적인 대화죠. 그쪽이 원하는 대로.”

 짐짓 손짓까지 으쓱하면서 그가 말했다.

 “내 수트, 그리고 자동차.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은 내가 제법 잘 나가는 회계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아니면 내가 하는 말 몇 마디를 듣고, 누군가는 날 궤변론자라거나 변호사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모습이 의도와는 달리 초초했다.

 “그쪽이 어느 편인지는 좀 알고 싶군요.”

 나는 이쯤 되면 그가 나를 놀리려 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굳이 제 발로 찾아와 한다는 소리가 이런 식이라면, 그건 그 나름대로 아주 고약한 인간이었다.

 “확인차 말씀드리자면 이 상담은 제가 주도하지만, 내담자의 협조 없이는 진행되지 못합니다.”

 지금에 와서야 후회하지만, 그때 나는 조금 날을 세워 대꾸하고 말았다.

 “내담자분께서도 상담이 필요해서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처방이 필요합니다.”

 순순한 대답이 따라나와 나는 그만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뜻밖에 그 표정은 고통스럽기보단 담담했다. 마치 옆집 고양이가 담 밑에 새끼들을 길렀다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환각을 봅니다. 그리고 그 환영과 함께 살죠.”




 “언제까지 나를 ‘그쪽’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겁니까?”

 두 번째 방문은 바로 이튿날이었다. 그는 나에게 환각 증세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가끔은 생생한 악몽을 꾼다. 가끔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눈을 감고 있는 순간뿐 아니라 눈뜬 시간에도, 똑같다. 일상에 녹아드는 환상.

 “…박사님 소릴 듣고 싶은 겁니까?”
 “아뇨,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선생님이라고도 하고. 편하게 불러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색이 짙은 눈썹을 구부려 정말로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생각보다 다양한 감정을 얼굴 하나만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날에도 그는 누가 잉크를 들이붓더라도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내가 ‘선생’이라고 부르는 건 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단호한 얼굴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데에 능숙해 보이지는 못했다. 무언가가 계속 그를 옥죄는 것마냥 불안한 얼굴을 하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은 채 대화가 띄엄띄엄 이어져 나갔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들을 수 있을까요?”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죠.”

 그 말을 할 때에 나는, 그의 눈에서 모종의 경멸과 비슷한 빛을 보았다고 착각했다.

 “사실 내가 여길 찾아온 데에는 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이유요?”
 “내가 보는 환각은 항상 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것이었죠.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것들입니다. 그분이 웃으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그분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새하얀 옷을 입으면, 나는 그 목 뒤에서 천천히 흐르는 피가 그 옷을 적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
 “그런데 며칠 전부터 거울 속에서 내 환상을 봤어요.”
 “…….”
 “목이 졸리더군요.”

 그는 잠깐 누가 목 언저리를 붙잡은 사람처럼 숨을 골랐다. 새까만 겉옷에 비춰 그 목덜미가 창백하게 하얬다.

 “나는 지금까지 두려워했습니다. 내가 잃어서 의미 있을 사람은 그분뿐이 없으니까요.”
 “지금까지의 환각 증세를 무시하고 사셨다는 말씀입니까?”
 “무책임하게 들리지만 그렇습니다. 난 그걸 경고로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분은 위험합니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거예요.”

 나는 뭔가를 끊임없이 적어 내려가던 손을 멈췄다. 기억하기보다는 기록하는 편이 적성에 맞았으나,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계속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택은 탁월했다. 몇 마디 글자로 묘사하기보다 그때 마주친 시선 하나가 여즉 형형하게 기억 속에서 옮겨 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게 내게로 돌아온 이상은 다릅니다.”
 “무엇이 말이죠?”
 “더 이상 초현실적인 경고에 한눈을 팔 시간이 없다는 거죠.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내 결정을 방해하는 정신증세를 떨쳐내고,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겁니다.”
 “현실적인 대안이라면…….”
 “그분을 살려야겠죠.”

 나는 그 말까지 듣고 나서,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유의해서 첫날 받았던 서류를 들춰 보았다. 그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어떠한 신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종의 강박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나는 으레 모든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내리는 판단과도 같이 너무 쉽게 결정을 내리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약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이틀이 더 지났을 때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는 내가 이 글을 쓰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이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고리타분할 만큼 배타적인 사람이었던가를 깨닫게 해 준 것이기도 하다. 그 날은 4월 17일이었고, 공교롭게도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렴 그게 무슨 상관일까, 사람은 믿지 않는 것을 얼마나 쉽게 잃는가.

 편지를 가져다 준 것은 간호사였고, 나는 누가 그걸 내게 전하라고 했는지 물었다. 간호사는 잠깐 동안 고민했지만 선뜻 이름을 대지는 못했다. 대신 온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게 차려 입은 남자더라고, 피 한 방울만 튀어도 온몸이 더러워질 것 같이 양털처럼 희었다고 전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나는 그대로 그를 무작정 쫓아 나갔고, 한번도 한 적 없던 무례한 짓을 저질러 그를 불러세우기까지 했다.

 “어디 멀리 갑니까. 다음 진료 예약도 잡지 않으시고….”
 “아마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겁니다.”
 “편지를 읽었습니다.”

 숨이 가빴기 때문에 나는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아주 짧고 띄엄띄엄 물음을 던졌다.

 “…그렇다면 왜 돌아오신 겁니까?”
 “그분이 아직 여기에 있으니까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한다면 나는.”
 “…….”

 잠깐 그가 말을 멈추면서 내게서 시선을 비켜 간 까닭에, 나는 아직까지도 그 다음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아직도, 아직도 똑같이 생각합니까? …그 사람, 그분에 대해서요.”
 “……아직도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죠.”
 “그렇다면, 당신에 대해서도요.”
 “질문이 하나가 아니군요.”

 그는 표정을 찌푸리며 웃었다. 꼭 다른 누군가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다소 연극적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렇다면 세상 모두를 포기하고 한 사람을 구할 겁니다.”
 “포기한다니, 당신조차도요?”
 “그래요.”
 “그럼 결국엔 똑같은 결말이군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되풀이하듯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내 입의 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아주 이기적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이 글을 읽었다면 으레 당연한 궁금증이 하나 들어 마땅할 것이다. 그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는가, 그러나 나는 그 모두를 인용할 수는 없다.

 박사님, 나는 내가 발견한 천국으로 향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화 즐거웠습니다.

 나는 그 뒤로 사무실에 돌아와 한 마디를 썼다. 소견서 맨 마지막 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