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 더 도어
카일레니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새벽부터 카나리아가 울었다. 새가 일찍 울면 그날은 비가 온다고 늙은 유모가 말한 적 있었다. 그 말을 아는 것처럼 깃털을 한껏 움츠러뜨리고 새는 아침 내도록 울었다. 저리 울도록 하지 않을 수 없소. 꾸물꾸물한 하늘을 내다보며 카일이 말했을 때 방을 치우던 하녀가 되물었다. 시끄러우세요? 아니, 그건 아니네만. 저 예쁜 목소리를 들으려고 놔둔걸요. 그 말에 카일은 줄곧 만지작대던 목깃 단추를 채웠다. 새장을 창가에서 떨어뜨려 놓으며 하녀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우는 거예요. 이 새들은 제 짝이 없어야 목소리를 낸다고 하데요. 거울 앞에서 카일은 잠깐 뒤를 돌아다봤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볕이라도 쐬게 해도 될까요? 그렇게 묻길래 카일은 채비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부터 날이 더욱 흐렸다. 마침내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카일은 걸쳐 쓴 로브를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손끝을 타고 오르는 쌀쌀한 냉기를 탁탁 털어내고 그는 문 안으로 옷자락을 끌어들였다.
"아, 여긴데요. 카ㅡ"
"쉿."
"ㅡ이일. 늦었네요. 아니면 내가 너무 서둘렀나?"
몸을 돌리자마자 마주친 얼굴에 흠칫 놀라 숨을 들이키면서, 카일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제 입에 가져다 댔다. 고분고분히 낮춘 목소리로 따져묻듯 몇 마디 덧붙이는데, 단어 하나마다 술기운이 실려 코끝이 찡했다.
"약주를 거하게 했소."
옷깃을 펼치고 탁자 맞은편에 앉으면서 카일이 말했다.
"안색도 별로인 것 같고."
문간이라 맞바람이 이마에 내린 머리카락을 살살 흩어놓아, 레니는 가물가물한 눈을 깜박이다 이내 표정을 지익 구겼다.
"말 좀 쉽게 할 수 없어요?"
몇 번을 채웠다 도로 비웠는지 모를 지저분한 잔에 또 손 뻗으려는 걸 막고, 카일은 술잔을 빼앗아다 제 앞까지 끌어왔다.
“틀린 말 한 거 없소만.”
라벨도 제대로 붙지 않은 오래된 술병을 흘긋 한 번 쳐다보고 그가 말했다. 술을 채우긴 했는데 뿌옇게 서린 먼지에 차마 제가 마시진 못하고 머뭇거리다, 저를 뚱하니 노려보고 있던 시선에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레니는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린 그 표정 그대로 대꾸했다.
“이럴 땐 그냥 괜찮냐고 한 마디 하면 돼요.”
카일이 가만히 눈만 깜박이는 새에 레니는 재빨리 자기 술잔을 되찾았다. 말릴 틈 없이 몇 모금 넘어가는 목울대를 쳐다보다, 카일이 떠듬더듬 물었다.
"…그게, 저. ……괜찮은 거요?"
"아뇨. 하나도 안 괜찮은데요."
축축히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레니는 테이블 너머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이쪽에 잔 하나만 더 가져다주세요."
"아, 깨끗하게 한번 닦아서."
고개를 내밀어 한 마디 보태고 나서 카일은 도로 제 앞에 앉은 얼굴을 흘긋대며 살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 벌개진 눈매에 좀 더운 듯이 살짝 입술을 벌리고 손부채질을 하는데, 잠깐 허공을 떠돌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왜요, 뭐 묻었나?"
"아니오, 그대 낯빛이…."
때마침 회색 앞치마를 펄럭거리며 나타난 여주인이 탁자에 술잔 하나를 퉁 하고 내려놓는 통에 집요한 시선이 떨어져나갔다. 빈 잔을 내려다보면서 카일이 말을 이었다.
"…말 안 해도 안 괜찮아 보인다고 하려던 참이오."
"그럴 만 하죠. 삼 개월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통째로 박살났으니까."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해해 보려고 양 눈썹을 진지하게 모으는 카일의 표정을 빤히 보면서 레니는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사무실에 가만히 있자니까 숨이 막혀서 퇴근하자마자 이것까지 그대로 들고 와버렸어요."
그는 의자 옆에 기대 놓은 사각진 서류가방을 툭툭 쳐 보였다. 그닥 납득하지 못한 것 같은 얼굴로 카일의 눈길이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따라 올라왔다.
"주간지에 싸구려 칼럼이 실렸더군요. 레니 로웬스타인은 올 시즌 최악의 건축가다."
"……."
"정작 까고 싶은 건 우리 회산데, 만만한 게 내 이름이죠. 총 책임자, 지휘 총괄, 레니 로웬스타인, 실용성도 혁신도 없는 진부한 디자인."
"…흐음."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여 가며 카일은 의무적으로 반응했다. 알아듣기 힘든 말보단 알코올 탓에 꼬이는 목소리며, 고귀한 신분의 체면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솔직한 발음이 어쩐지 우스웠다. 레에니 로우엔스타인, 술에 취해 자기 입으로 발음하는 그 이름이 듣기에도 참 낯설었다. 좋지 못한 타이밍에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다물면서 애써 시선을 내려 그는 잔을 채웠다.
"잘 이해 못하겠죠. 이해해요."
"…아, 그런 게 아니라."
"말하자면 그런 거죠. 누가 왕자님을 모해하는 글을 막 써서 온 나라에 붙였다고 상상해 봐요."
“저런! 그런 작자는 당장 하옥해야 마땅한 것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벌떡 허리를 펴더니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로 쿵, 하고 짐짓 주먹을 내리꽂는 카일이 우스워 그만 피식 레니는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찌푸리고 있던 눈썹이 새어나온 웃음에 이상하게 찌그러져 그 얼굴도 만만치 않아, 진지하게 입술을 앙다물었던 카일마저 푸스스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미안, 미안해요. 웃으려던 게 아닌데 너무 진지해서.”
소리 죽여서 큭큭거리던 얼굴이 보기 나쁘지도 않은데, 잔의 서리가 옮아 간 양손으로 눈가를 감싸느라 레니의 목소리 끝은 다소 뭉그러졌다.
“보기 좋소.”
“응? 뭐라구요.”
“…아니오. 이런 모습 볼 줄 알았으면 선물을 준비해 올 걸 그랬군.”
손가락 끝에 들썩 하고 올라갔던 각진 안경이 코끝으로 미끄러졌다. 시선을 들어 마지막 말만 겨우 주워들은 채 레니가 웅얼웅얼 되물었다.
“선물이요?”
묻는 말끝에 기대감이 실려 있지나 않을까 카일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아까보다 한결 길어진 말에 주절주절 꼬리를 달며, 귀인의 체통 같은 건 전혀 묻어나지 않는 변명이거나 투정 같은 제 말을 들었더면 버나드가 어떻게 말했을지 아주 잠깐 곱씹기까지 했다.
“그대가 내 정원을 둘러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곳보다는 별궁이 더 예쁘다오. 신화에서 가져온 이름만큼이나 화려하지. 꽃을 선물할까 했는데, 그대의 다용도실로 돌아갈 때쯤이면 시들고 말 것 같아서.”
“……무슨 꽃이었는데요?”
짤막하게 돌아온 물음에 화끈화끈했던 귀끝이 한결 식어 카일은 그을린 책상 언저리를 헤매던 시선을 도로 끌어왔다. 여전히 문틈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어 놓는 바람에, 레니는 연신 간질간질한 눈을 깜박였다.
“클리티에의 이름을 딴 해바라기요.”
버림을 받고도 눈 돌리는 법을 몰라 태양만 바라보는 요정이 깃들었다는 어린 날의 이야기였다. 허무맹랑한 것을 믿을 여유는 없다지만 레니와의 화젯거리로는 제법 감상적인 구석이 있었다. 할 수 없는 말이 고여 동그랗고 무겁게 피고, 그리움에 바짝 마른 몸이 가까스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받쳐 들었다. 클라티에. 이야기 속 이름 뒤에 다른 단어 하나를 덧붙였다. 로웬스타인. 그 단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면 누군가에게는 달밤에 연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밀어처럼 남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 안되겠네요. 내 작업실엔 해가 들지 않아요, 카일.”
“그래서 그만뒀소. 실은 새를 선물하고자 했었는데.”
카일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깔깔한 목을 좀 축이고 싶어 그는 술잔에 입을 댔다. 말이 마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저에게 쓰인 단어는 다용도실에서 온 낯선 이에 비하기에는 너무 적어서 주어진 낱말만을 엮어 말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지도 몰랐다. 대신 말을 보태는 쪽은 곧잘 레니였다.
“…그건 왜요?”
“…….”
짝을 잃고 기약없이 노래하다 목이 쉴 것이 가엾소. 그 새장이 꼭 눈에 보일 만큼 작지 않아도, 제게도 철창 같은 기다림이 두르고 있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표현할 단어가 부족해 그는 말을 아꼈다.
“갑자기 선물이라니 의외잖아요.”
“아, 그런 뜻이었소.”
“남쪽 몰락한 영주의 땅도 아니고 작위도 아니고.”
새가 아니라 선물의 의미를 묻는다는 걸 깨닫자 어눌하게 대답하려던 카일은 이내 이어진 말에 대꾸 대신 큼, 큼 헛기침을 섞었다.
“당신한테서 소박한 꽃이라니 특별하잖아요.”
“…그렇소. 그것 참 다행이오.”
그는 무심코 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기려다 이내 내려놓았다. 금방 레니의 어깨 너머에서 여주인이 잔을 닦던 낡은 앞치마로 얼굴의 땀을 닦는 모습을 봐 버린 탓이었다.
“백 번의 말도 잊혀지면 그만이잖소.”
“……그래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레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코올에 느긋하게 풀려 버린 시간 탓인지 그 모습마저도 천천하게 보였다. 레니는 잔에서 손을 떼고 반대편 옷깃에 슬쩍 닦았다가, 몸을 뒤로 기대 서류가방의 버클을 톡톡 두드렸다.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툭 하고 열어젖힌 가방 안쪽에서 얇은 종이를 구깃구깃 끄집어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브락 구겨져버리는 도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레니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바짝 폈다. 크고작은 수많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면에 정성껏 줄을 대고 그은 선들이 손가락 아래에서 또 선으로 도형으로 접혀 나갔다. 반을 접고 다시 옆으로 세워 올리고, 점점 크기를 줄여 나가는 종이를 카일은 마냥 흥미롭게 눈으로 쫓았다. 뭘 하는지 가르쳐줄 맘이 없는 것처럼, 어린애 같은 호기심을 흘긋 한번 쳐다보고 레니는 입술을 빙그레 말아올렸다.
“볼래요?”
뾰족한 역삼각형 모양에 양 옆으로 길쭉하게 모서리를 내민 종이를 손끝으로 잡고 그가 물었다. 카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동시에 휙, 하고 레니의 손에서 떠난 종이 비행기가 테이블을 건너 제게로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치우고 손으로 탁 붙들자 사부작 하고 손끝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그만 놓아버린 탓에 손바닥에 스치고 종이조각이 그대로 테이블 모서리에 내려앉았다.
“…이, 이게 뭐요?”
“종이 비행기예요.”
“종이로 접은 나비 같은 건가?”
아, 하더니 레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팔을 뻗어 도로 종이 나비를 거둬간 그는 끝이 접혀버린 날개를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눌러 펴더니, 카일에게 말했다.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데, 당신도 해볼래요?”
테이블에 몸을 반쯤 숙여 기대고 그가 이리저리 종이를 돌려 보며 말을 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흑연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선물하는 건데. 제 고민을 같이 멀리 날려버릴 기회.”
구깃구깃 접어 버린 종이가 이제 더는 쓸모없게 된 설계도면이라는 걸 굳이 알 필요 없는 카일이,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레니의 손이 제 손등 위를 덮어 감싸고 손 끝에 빳빳한 종이 끄트머리를 쥐여 주었다. 콩콩 뛰는 맥박이 제 손 위에서 제것처럼 두드려 왔다. 부드럽게 손목을 잡고 아주 연약한 활시위를 당기듯 조심히 뒤로 끌어당겼던 손은, 조금 힘주어 앞으로 밀었다. 휙, 하고 손가락 사이에서 놓친 종이 나비가 호선을 그리며 휘이 손을 떠났다. 꼿꼿한 비행 끝에 살짝 왼쪽으로 휘어 버리는 것을 아쉽게 지켜보다 레니는 빙그라니 웃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것보다 멀리 갈 수도 있어요. 날개만 다시 접으면….”
고개를 돌리려는데 말끝이 그대로 삼켜졌다. 아직 겹치고 있던 손이 천천히 테이블을 짚으면서 손 위에서 손으로 무게감이 옮아갔다. 실수처럼 부딪혔던 입술이 술기운에 오른 온기를 촉촉하게 안으려다 그만 머뭇거렸다. 멍하니 알콜 향이 짙은 입술 끝은 미처 떨어지지도 못했는데, 아직 덮고 있던 카일의 손이 조심스레 끌려내려갔다. 어디서 저녁이 묻어왔는지 아직도 손이 차다.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답잖게 먼저 도망치려는 손을 따라잡아 조심스레 레니는 손가락이며 손목을 더듬어 쥐었다. 꼭 구겨진 종이조각이 된 것처럼 덮여쥐인 채 카일은 후회했다. 기다림을 핑계 삼지 말았어야 했다. 목께가 달아오른 건 버려질 밤과 내쳐질 철장 같은 건 진작에 없었던 것을 지레 겁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미끄러진 안경테 모서리가 눈가에 닿아서 레니는 코끝을 찡그렸다. 떨고 있던 게 제 몫이었기에, 우습게도 다시 열기가 가까워졌을 때는 입술 끝으로 웃음이 났다.
한참 전에 저만치 날아가 꽂힌 종이 비행기가 파스락 하고 밤바람에 들석였다.
*천국은 없다, 허연